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세침검사 결과는 5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진료 예약을 잡았다. 그렇게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수많은 감정과 생각이 마음속에 스쳐 갔다. 나는 내 마음에 떠오르고 가라앉는 것들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결과를 듣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암 환자들은 크게 다섯 가지의 마음을 순서대로 경험한다고 한다.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 사이클대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단계를 건너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한 감정에 아주 오랫동안 머무를 수도 있다. 다행히 나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 감정과 생각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잘 토닥이는 연습을 많이 했다. 그래서 생각보다는 훨씬 빠르게 내가 처한 상황을 수용할 수 있었다.
나의 경우 부정 단계는 거의 없는 듯이 지나갔다. 부정 단계는 ‘암일 리가 없어!’, ‘뭔가가 잘못된 거야!’라며 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나는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암은 거의 확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암이었을 때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먼저 떠올렸다.
부정 단계가 암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면, 타협은 아무튼 암이라는 것은 인정할 테니 대신 “내가 착하게 살게. 덜 아프게 해 줘"라든지 “이때까지만이라도 건강하게 살게 해 줘.”라며 협상을 시도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다. 다른 것으로 회피하지 않고 최대한 문제에 직면하고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한다.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부정과 타협 단계에 오래 머무르진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분노와 우울이었다. 나의 핵심 감정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나는 평소에 분노와 우울을 자주 경험한다. 화가 잘 나고, 또 잘 자책하며, 우울해한다.
나는 화라는 감정을 굉장히 싫어한다. 자라오면서 말 같지도 않게 화를 내는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가 나면 곧바로 자책감으로 이어진다. 나를 화나게 만든 상황과 사람에게 책임을 돌려야 하는데, 언제나 화를 내는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화를 내는 내 모습이 싫은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이 내적귀인이라고 하는 것은 자책감을 느끼게 하고, 자책감은 우울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내가 분노와 우울 단계에 오래 머무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화를 내는 것을 싫어하면서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이 분노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지 않는가 말이다.
분노는 대개 이차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분노를 느끼게 하는 진짜 감정이 있다는 말이다.
나의 경우, 억울함이었다.
‘아니! 도대체! 왜 내가 암에 걸려야 돼?’
마음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몸 좀 돌보지 못했다고 이 세상이 나에게 암을 주다니!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없는데! 진짜 잠도 줄여가며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일했는데! 힘든 일이 많았어도 남 탓 안 했잖아! 이겨내려고 극복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이제 좀 행복하잖아!!!
하지만 생각과 행동을 많이 검열하고 통제할수록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기는 더 쉬워진다. 나는 평소에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극도로 싫어한다. 최대한 말을 조심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사회적 관습이나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은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한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책임을 진다. 그 이면에는 내가 피해를 받지 않고, 또 상처를 받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배려를 한 만큼 배려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곧바로 화가 난다. 나는 통제하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들을 보며 분노한다. 스스로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또 나에게 시련을 준다고 생각했다. 너무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내 잘못이 아닌 일이 생겼다는 생각에 처음 며칠은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