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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cember 디셈버 Jul 10. 2024

20. 선생님, 시술용 세트 싸주세요

담당의님~ 주문하신 시술용 세트 커스텀 나왔습니다

처음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어 근무를 시작했을 때에, 모든 것들이 낯설어 애를 먹는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준비를 했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일이 막히거나, 혹은 경험이 부족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황들이 나를 종종 곤란하게 만들었었다. 이러한 일들은 신규 간호사들에게 흔하게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보통은 병원차원의 프로토콜을 참고할 수 있도록 병동 내에서 자료를 비치해 둔다.


그렇게 특별한 케이스가 아닌 경우에는 프로토콜을 잘 숙지하고 있다면 대체로 무난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어려웠던 것 중에 하나는 아무리 프로토콜을 달달 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개개인의 취향을 모두 알고 있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병원에서는 물품관리를 위해 병동에 필요한 것들을 한 곳에 모아두고, 필요한 물품이 있을 때마다 준비해서 환자의 병실로 가거나 혹은 별도의 처치실로 가지고 간다.


예를 들어 환자가 모종의 이유로 소변을 보지 못할 경우, 소변줄을 삽입하는 처치를 하기도 한다. 이때, 소변줄은 신체 내부로 들어가기 때문에 세균 등 감염의 위험성이 높아지게 된다. 이러한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프로토콜에 따라 깨끗하게 소독이 된 물품들만을 사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들은 미리 소독실에서 포장이 되어 소독을 해 병동으로 보내주는데 이때, 소변줄 등은 미리 소독 후 포장이 된 상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병원 내 소독을 거친 세트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준비해 가져가는 것이 보통이다.


소변줄을 삽입하는 처치는 간호사들이 할 수 있기 때문에 보통 본인에게 필요한 것들 스스로 준비해 챙겨가는 것이 보통이다. 미리 준비해 둔다고 하더라도 각자의 손 크기에 맞는 장갑의 사이즈를 알기가 어렵기도 하고, 각자의 취향 등에 따라 선호하는 제품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가 의사에 의해 수행이 되어야 하는 처치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한국에서는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가 결정이 될 경우, 담당 의사가 담당 간호사에게 알린 후 보통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하던 일들을 정리하고 재빨리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두는데, 이때 그 담당 의사가 어떠한 물품을 더 선호하는지 혹은 추가로 원하는 물품이 있는 지를 보통은 눈치껏 파악해 준비하고는 했다. 물론 대부분의 의사 선생님들은 추가로 원하는 물건이 챙겨져 있는지 재확인을 하거나, 장갑의 사이즈를 스스로 교환해 가져간다. 하지만 종종 왜 본인이 원하는 물품이 없느냐 대뜸 짜증을 내거나, 미리 확인하지 않고 환자의 병실로 이미 이동한 상황에서 콜벨을 눌러 이것저것들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바쁜 와중에도 하던 일을 접어두고 물품을 전달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내가 근무하는 현지의 병원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환자에게 필요한 처치 등이 결정이 될 경우, 담당 의사가 담당 간호사에게 알리는 것은 한국과 같지만 그 이후 담당 간호사는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지 않는다. 시술이 담당의사에 의해 이루어질 경우, 시술을 하는 담당의사가 모든 것을 찾아 스스로 준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호사는 보통 시술에 필요한 다른 일들을 준비한다.


예를 들어 시술과 관련된 혈액검사 결과를 한 번 더 훑어본다던지, 동의서가 필요한 시술일 경우 동의서를 재확인한다던지 (동의서 역시 따로 담당의에게 말하지 않아도 담당의가 미리 받고, 간호사에게 취합을 위해 전달하는 것이 보통이다.) 혹은 환자에게 가 방문객이 있을 경우 시간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 긴장을 낮춰주기도 하고 또 필요한 경우 미리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하거나 하여 말 그대로 환자의 '안위'에 더 많이 신경을 쓸 수가 있다.


한국을 떠나 현지로 넘어와 많은 수의 환자들을 케어할수록 한국에서도 내게 시간적 여유가 더 있어 환자들에게 더 많이 신경을 쓸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커진다. 수많은 한국 환자들 역시 처치나 시술을 앞두고 현지 환자들과 다를 바 없이 긴장을 했었을 텐데 바쁜 근무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며 더 긴급한 일에, 더 위중한 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환자들에게 세심하게 신경 써주지 못한 것들이 문득 마음에 걸리는 퇴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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