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여름 끝에 죽다 4
4.
당신이 다시 나타났네요. 당신들이. 준이라는 남자와 함께. 당신과 준의 관계를 물어보지 않았다. 만약 두 사람이 애인 관계라면, 정상적인 범주의 사고를 한다면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나는 준이라는 남자가 잠시 머무르다 떠나겠지 생각했다. 당신을 다시 만난 것만으로 나는 모든 걸 너무 쉽게 받아들였다. 의심도 무엇도 없이.
나는 물관과 체관을 가지고 있다. 식물에 있는 물관과 체관 말이다. 물관엔 여느 사람들과 같은 색의 피가 흐르고 체관에는 내가 지내왔던 시간의 흐름이 흐르고 있다. 나무는 두 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의 몸속에 흐르는 물관은 똑같을지 모르나 체관에 흐르는 것은 제각기 다르다. 그 후 우리는 이상한 동거를 시작하였다. 당신과 준은 신기할 정도로 함께였다. 마치 샴쌍둥이처럼. 내가 출근해서 회사에 있을 동안 당신들은 무엇을 할까 궁금했다. 가끔은 호기심으로 혹은 불안한 마음으로, 치장한 관심으로, 집에 전화를 했지만 언제나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나 막막했을 뿐이다.
그래도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어느 날 밤, 당신이 나를 쓰다듬어 주었다. 준의 숨소리가 고요해지고 나서. 나도 당신의 몸을 쓰다듬었지만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았다. 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달리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당신이 나를 거부한 것 외에는 사라지기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기억나나요? 내가 수박 한 통을 사서 집에 왔던 날, 당신은 그 수박을 보며 말했다.
"물로 만들어졌는데 왜 이렇게 딱딱한 거지?"
준은 무엇에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바닥에서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날은 우리 모두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나는 누군가의 손길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감고 그 손길을 느꼈다. 그 손끝이 땀에 젖은 내 몸 구석구석을 스칠 때마다 몸속 혈관에 흐르는 피도 따라 뜨거워졌다. 내 손은 이미 당신의 가슴에 가닿았다. 납작한 손바닥에 들어오는 가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작은 당신의 가슴이지만 내가 그 순간 만진 가슴은 당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보다 내 손바닥이 먼저 알아차렸고 나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가슴이 없. 어. 졌. 다. 내 몸을 쓰다듬던 손길은 바로, 준이었다. 나는 재빨리 매끄러운 손을 굳게 잡았다. 그와 동시에 그 손은 내 손바닥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당신의 손을 찾아 내 몸에 올렸지만 당신의 손은 신경질적으로 내 손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당황했다. 당신에게 준은 하나의 완충장치였던 것일까. 이쯤 되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때, 다시 부끄러운 듯 조심스럽게 내 몸을 더듬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다. 시. 준이었다. 나는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었다. 내게 당장 중요한 것은 동물적 쾌락이 아니라 인간의 애정이 스며든 손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그 손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던 따뜻함이었다. 늘 석둑거리던 몸이- 지치고 지쳐 축축 처진 몸뚱이를 끌고 들어와서 아스팔트처럼 달궈진 방바닥에 몸을 뉘여도 불현듯 찾아들던 그 냉랭함. 몸의 세포들조차도 얼어붙었던 몸뚱이 -처음으로 따뜻해지던 밤이었다. 그것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5.
또다시 기차가 도착하고 있네요. 역무원은 닫힌 문을 열고 개표를 시작합니다. 당신들에게 받은 상처를 어떻게 다 적을까요? 다 적는다 하더라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 세 명은 동시에 섹스를 한 적이 없었다. 마치 트라이앵글처럼. 한 사람이 맞은편 사람에게 가기 위해서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곧바로 도달하는 방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로 갔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준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렸고 준의 손길을 목말라했다. 그리고 준이 당신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관계라는 것에 언제나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굳이 당신들에게 물어볼 일도 아니란 것을 안다. 게다가 나는 당신에게 있어서 준, 준에게 있어서 당신, 향의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관계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내가 없는 곳에서 당신들은 무엇을 하며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 도무지 정확하고 투명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가끔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당신은 늘 혼자서 맞은편에 앉았고, 나와 준은 나란히 앉아 밥이 나올 때까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 무렵, 나에게 하나의 비밀이 생겼다. 나는 당신들 몰래 회사에서 버스로 세정거장 떨어진 정신과에 다니고 있었다. 의사는 당장 그들을 내보내라고 말했지만, 나는 절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가능한 한 빨리 집에서 내보내겠다고 약속을 하고 처방받은 약은 변기에 모조리 버렸다. 그러면서도 매주 꼬박꼬박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약이 없으면 하루도 버티기 쉽지 않다. 그때 이미, 우린 너무 깊게 엉켜버린 후였다. 준은 내게 자신의 몸을 만져달라고 애원했고 가끔씩 당신은 나의 몸을 받아들였다. 우리 세 명은 어떤 관계였을까요?
마지막 장마가 남쪽에서부터 올라올 무렵, 당신이 사라졌다. 아니, 당신들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 여름동안 함께였다. 비로 변한 눈물이 당신들을 삼키기 전까지. 나는 두 마리의 늑대와 잠을 잔 것이다. 우리는 여름 내내 서로의 은빛 털들을 쓰다듬었다. 당신들은 지갑 속의 카드를 갖고 사라졌다.
플랫폼에 언제 들어왔는지 열차가 곧 떠난다는 마지막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뒤늦게 역에 도착한 노부부가 뒤뚱뒤뚱 느릿느릿 개찰구를 빠져나가고 있다. 가장 먼 곳으로 가는 기차표를 건네준 역무원이 마지막 친절을 베풀어 기차가 곧 떠난다고 알려준다. 나는 역시 미동도 없다. 역무원은 그대로 역무실로 사라진다. 굳이 정신과 의사가 여행을 권해서가 아니다. 나는 이 도시를 떠나고 싶다. 나의 체관이 말라버렸기 때문이다. 당신들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스스로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다. 혈관들이 지금까지 버텨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내 손목엔 두꺼운 붕대가 감겨 있다. 당신, 향. 그리고 준. 당신들이 내게 접근한 이유가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의도적이 아니었기만을 바랄 뿐이다.
스스로 달라지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평생 당신들을 기다리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 몸속의 물관 역시 썩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겐 당신들이 전부이다. 전부였다. 전부였다. 내가 두 사람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건 기적이다. 이제 나는 그 집과 함께 했던 시간들에 적응하지 못함을 알고 있다. 체관에는 리튬 액이 흐르고 있다. 결국 내 물관에 흐르는 피의 색은 무지개 색으로 변할 터이다. 기차가 긴 기적소리를 만들며 사라진다. 가장 먼 곳으로 가면 당신들을 잊을 수 있을까요? 당신들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고 싶습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곳에 앉아 가장 먼 곳으로 떠나는 기차표를 사야 할까요? 몇 장의 기차표가 지갑 속에서 나무를 떠난 이파리처럼 천천히 썩어가야 할까요? 이번에도 나는 기차를 타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죽은 나무입니다. 이른 꽃과 많은 열매들이 맺혔던 그 푸르던 가지들은 모두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직 이 뒤에는 안 고친 거지? 아니면 주인공의 여성적인 목소리?)
당신의 모습은 언제나 비 오는 날 같았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두꺼운 구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런 당신에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순수했습니다. 그리고 시작이었습니다. 당신이 술에 취한 그 밤, 우리가 처음 만난 그날 밤, 거기 지하철역에서부터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자취방으로 들어오던 순간부터 사라졌다가 다시 문을 열던 그날을 떠올리면 가슴 한쪽은 쌓였던 눈처럼 한껏 주저앉으면서도 왜 그렇게 눈물 나도록 기뻤는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내가 당신이 취해야만 하는 이유를 모르는 것처럼, 당신도 나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 흔한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도 물어본 일이 없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신과 그토록 많은 시간을 보내고 난 지금도 당신은 내 마음에 죽어가는 나무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아니 죽은 나무로 서 있습니다. 누군가가 억지로 잘라낼 수도, 뿌리째 잔인하게 파낼 수도 없을 만큼 깊게, 깊게 마음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시작도 없는 바람이 불 때마다 죽은 나무 가지들은 윙윙거리며 바람을 따라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럴 때마다 새날이 올 거라 믿으며 살아가는 것만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았던 그때. 가슴 끝이 너무 아파 숨조차 쉴 수 없을 때마다 가지는 하나씩 잘려나갔습니다. 점점 메말라가는 당신의 나무를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지내야 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당신이 내 안에서 살고 있는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당신이 다시 제 앞에 나타날 것 같은 날입니다. 당신이 떠났던 그 문으로 다시 걸어올 것만 같습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오랫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로 잠들어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아직 남은 마지막 여름의 열기가 사그라지지 않은 방바닥에 누워 있을 당신의 얼굴을 그때처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야겠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 집을 떠날 수 없었던 운명이었습니다. 이 여름이 끝나면 나무는 죽을 것입니다. 가장 뜨거운 오후 두 시. 물관에 흐르는 피가 무지개 색이 되면 나도 나무도 죽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