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 조금씩 잊혀 간다
재원을 둘러싼 모든 세계는 하나씩 하나씩 자리를 잡아 그대로 굳어갔다. 그렇게 화석이 될지도 모를 만큼 견고하고 튼튼하게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리를 잡았다. 1년 후의 계획, 3년 후의 달라질 것들을 생각해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아주 잠깐씩 우울해지는 건 왜일까.
자신의 미래가 안정되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재원은 그 우울함의 근원을 알 수 없었다. 진희와의 결혼식, 더 넓은 평수의 아파트. 보다 더 큰 차. 그보다 먼저,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떨어진 스포츠센터에 다음 달부터 진희와 함께 다니는 것. 재원은 이 모든 게 엄청난 일임에도 그다지 현실감 있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진희가 기뻐하는 일이었으므로 기꺼이 동참해 주었다.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지우기엔 너무 깊이 새겨진 그녀가 있었다. 얼마나 깊이 새겨놓았던지 이제는 좀 잊고도 싶은데, 이제는 그만 생각해도 될 것만 같은데 재원의 가슴에 주홍 글씨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선명해지는 그녀였다. 오래된 시간은 먼지일 뿐이었다. 바람이 불면 너무나 쉽게 날아와 재원의 마음속에 둥지를 틀고, 숨 쉬고 있는 윤희를 지울 수가 없었다.
바람은 예고도 없이 언제든지 불어오기 때문이다. 그 바람은 아주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도망칠 수도 없었다. 아직도 몇 개의 바람이 재원을 향해 불어오고 있는지 전혀 예상할 수가 없었다.
막히는 도로의 차속에서도, 회식을 끝내고 신발을 신는 순간에도, 수업 중에 갑자기 내리는 창밖의 비속에도 그녀는 스며들어 있었다. 마치 그곳이 제 집인 것처럼.
그럴 때마다 재원은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었지만 윤희와 함께 서있었다. 때때로 그녀는 재원이 다니던 대학교 앞 자주 가던 분식집에 마주 보며 앉아 있기도 했고, 한낮에도 어두운 지하 자취방에 알몸으로 함께 누워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재원의 눈앞은 아득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만이 바람의 끝에 남았다. 처음엔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미련이거나 아쉬움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미련이라고 생각하기엔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알았다. 재원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윤희는 침대에 누워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안으면 안겨질 듯 그렇게 실체적이고 세밀하게 그녀는 재원의 곁에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재원은 점점 더 빠르게 공기 속으로 스며들었다.
재원은 그녀가 조금씩 잊혀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다. 자신도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되기로 했다. 그 사실은 이제 달라질 수는 없는 현실이며 사실이었다. 그에게는 진희가 항상 곁에 있었다. 재원의 사소한 감정 섞인 때론 피곤한 한마디의 말에도 쉽게 불안해하고, 울어버리는 여자, 말이다. 그럴 때마다 재원은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윤희를 잊어야 한다고 마음의 뜻을 굳게 가다듬었다.
재원이 우울해하는 진희에게 미안하다고 한마디만 하면 진희는 어느새 밝아져 평온해지는 단순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재원에게 들려주었다. 재원의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세 개의 슈퍼 중, 어느 슈퍼가 어떤 물건의 가격이 더 싼 지, 어느 집, 아주머니가 친절한지, 어느 곳이 덤을 더 잘 주는지, 학원에서 어떤 선생님이랑 친한지, 어느 학생이 왜 학원에 나오지 않았는지 아주 시시콜콜한 것부터 자신의 친구들과 관계된 남자 이야기까지 하루 스물네 시간을 하나도 빠짐없이 마치 재원에게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는 듯 그의 앞에서 투명해지려는 듯 많은 말을 했다. 재원은 한 번의 불평도 없이 끝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윤희는 그렇지 않았었다. 윤희는 재원과 나란히 앉아 비디오를 보거나 재원의 다리나 배를 베고 책을 읽거나 긴 한숨을 쉬며 담배만 피웠다.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거나, '고독해.'라고만 했다. 그 고독해란 뉘앙스는 매번 다르게 들렸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재원은 이상하게 그 분위기나 윤희를 몽땅 알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윤희는 충분히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연락도 없이 나가서는 아무 때나 술에 취해 자취방 문을 두드리는 윤희였다. 재원은 진희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고, 그녀의 주변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대해 알아야 했다. 그녀가 자신 앞에서 투명해지는 것을 도와주어야만 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언제나 재원에 대한 사랑으로 끝을 맺었다. 그녀의 마음은 그것을 자꾸 반복해서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이었다. 재원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자신의 마음속엔 진희에게 이야기하지 못할 너무도 많은 것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희와 사랑을 나눌 때도 재원은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몸은 군살 없이 매끈했지만, 진희의 가슴을 만지면서 재원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기억해 내는 윤희의 가슴을 만났고 진희의 몸속으로 들어갈 때면 고통스러워 일그러지는 진희를 뒤로 아득히 빨려 들어간 윤희를 느끼려고 발버둥 치는 자신을 발견했다.
진희와 윤희의 몸은 완벽히 달랐다. 결혼 전에 몸을 나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때문인지 진희의 몸은 언제나 경직되어 있었고, 재원을 받아들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그녀는 재원이 속옷을 벗길 때면 손끝으로 속옷의 끝을 잡고 있었다.
재원은 그런 그녀를 보며 일방적이라는 느낌도 들었다. 나쁘게 말하면 그녀와 몸을 나누는 것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마치 재원이 그녀를 강간이라도 하는 듯한 느낌마저도 들 때가 있었다. 윤희의 몸에서는 늘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섞여 있었지만, 진희의 몸에서는 너무도 깨끗한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진희와 몸을 나누는 것은 윤희와의 그것처럼 지독하지도 않았다. 재원은 가끔 진희에게서 어서 빨리 끝내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윤희에게서 처음으로 느꼈던 죽음 같은 아득함도 진희에게서는 느낄 수가 없었다. 진희는 재원의 목을 조르거나 몸을 깨물지도 않았다.
몸이란, 마음보다도 먼저 길들여지는 법이다. 마음의 기억이 떼어내기 어렵다고는 하지만 몸의 기억만큼은 아니었다.
윤희라는 이름을 가진 마음속의 날카로운 칼은 언젠가는 진희를 통해 무디어질 것이라고 재원은 믿었고 믿었다. 찔러도 아프지 않을 만큼 녹이 슬고, 무디어질 수 있는 그 이유는 진희에 대한 사랑뿐이라는 것도 재원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재원의 품에 안겨 있을 때, 재원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스스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평온한 날들의 행복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행복하게 여길만한 나이가 벌써 되었을까.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많은 것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그것들 중 하나라도 잃는다는 즉, 마음의 그 부분만큼이 비어버린다는 것을 점점 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이였다. 얼마 동안 살아갈지 모르지만 그 남은 시간 동안은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길 간절히 바랐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소중한 것들로만 가득 채워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곡이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왠지 재원에게 바람 같았다.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져간다.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윤희가 잊혀져가는 것을 재원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녀를 다른 모습으로라도 기억에 남기고 싶은 것일까. 재원은 자신도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이렇게 우울해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진희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다짐하는 것들은 그때뿐인 감정이었을까. 마음 한편으로는 윤희가 잊혀져가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녀에 대한 추억들을 다르게 저장하고 싶어 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만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가장 행복했었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녀의 결혼식 때 그녀를 바라보며, 참았던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날들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때를 다시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지나버린 뒤다. 되돌아보면 그녀에 대한 모든 재원의 행동들과 의미들은 소중한 기억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추억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도, 어쩌면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억 속에서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다른 세계에서 걸려온 전화는 재원이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를 완전히 파괴시킬만한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진희를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 김광석의 노래가 들리는 차 안에서 재원은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것은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