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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ki Nov 10. 2024

제17화 - 다른 세상에 살다

제17화 - 다른 세상에 살다

  woher ist du? 어디에서 왔니?

  윤희는 호텔에서 걸어 나와 택시를 타고 집에 온 그 순간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외부와 접촉하는 일 따윈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다. 아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화기의 코드를 뽑고, 핸드폰을 꺼두는 일이었다. 종일 집에 처박혀 있었으므로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죽여 놓았다.


  방안에 있는 TV, 거실에 있는 TV랑 오디오를 하루 종일 켜 놓았다. 여러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과 조작된 웃음소리가 윤희의 공간을 채웠다. 모두 윤희와는 상관없는 일들만 떠들어댔다. 게다가 일방적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윤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빛도 스미지 않는 이토록 커다란 관에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거울 속의 그녀가 쓸쓸한 윤희를 바라보거나 가끔, 아무것도 먹지 않은 그릇들을 설거지했고, 보고 만지는 이, 없는 몸이었지만 샤워를 했고, 진열장에 남아있는 술들을 비워나갈 뿐이었다. 거실 구석, 가려진 커튼사이로 지고 있는 여름 태양이 비집고 들어와 집안 깊숙이 박혔다. 그리고는 서서히 사라졌다.


  윤희는 그 빛이 자기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커튼을 조금 열어 놓고 윤희는 빛을 기다렸다. 커튼 틈 사이로 빛이 들어올 때를 기다려 그녀는 옷을 하나씩 하나씩 벗고 그 빛이 자신의 몸을 쓰다듬게 했다. 그녀의 몸은 햇살이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살아났다. 햇빛이 사라지면 그녀는 벗은 몸으로 아무렇게나 앉아 담배를 피웠다. 재떨이에 있는 꽁초까지 다 주워 피웠다. 그 어떤 이유로도 집밖으로 나가기는 싫었다. 다음날의 햇살을 기다렸고, 기다렸고, 기다렸다.


  밤은 점점 길게만 느껴졌고 그 밤 동안(그 밤이 너무 길고 힘겨웠다.), 윤희는 두려워 잠들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가도 벌떡 일어나면 부엌으로 걸어가 과도를 꺼냈다. 자신의 손목에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 칼을 들어 올릴 때면,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세게 잡았고, ‘살아야 해.’라고 속삭였다.


  그때마다 거울 속의 그녀는 길고 우아한 잔에 와인을 따라 주거나, 어디서 구했는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윤희는 처음으로 그녀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았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보다 훨씬 희미해져 있었다. 그녀는 쉽게 지치는지 윤희를 겨우겨우 막아내고는 힘없이 맞은편 의자에 주저앉았다. 윤희는 담배를 깊게 빨아 그 연기를 혀끝으로 둥글게 만들었다.


  파란 연기는 동글동글 윤희의 입에서 허공으로 날아가 춤을 추었다. ‘하핫, 꼭 도넛 같네…….’ 쾌활하고 투명한 아직 익지 않아 아린 딸기 같던 시절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담배 연기가 사라진 그곳에서 문득, 윤희는 소연이 떠올랐다. 윤희에게 술과 담배를 알게 해 준 여자, 그녀의 두 번째 남자가 된 지영으로 인해 사이가 어색해지기 전까지 윤희와 소연은 매일을 함께 했었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기 전까지 그럴 줄만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 첫 MT를 갔을 때였다. 그때까지, 자신과 같은 과인지조차 몰랐던 소연과 나란히 술자리에 앉게 되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고, 소연은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 보였다. 그게 윤희가 기억하는 소연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었다. 윤희와 소연은 선배들이 주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도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밖으로 조용히 나갔다. 여자 선배하나가 ‘니들 허락도 없이 어딜 가냐?’라는 말이 들려왔지만 소연은 개의치 않았고 윤희는 말없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소연을 따라갔다. 선배인지 동기인지 모를 남학생 둘도 일어나더니 별 다른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야, 너네까지 왜 그래?’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서울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밖에 걸리지 않는 수련촌의 밤하늘은 마른 장작들이 타오르는 연기로 가득했다. 그 연기들은 밤하늘 저 멀리까지 퍼져나갔다. 까만 하늘은 한가득 빛나는 별들로 눈부셨다. 북한강 기슭을 따라 삼삼오오 학생들이 모여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기타를 튕기거나 허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날파리와 하루살이가 불빛을 따라 이동했고 모기가 앵앵거린다며 콧소리를 내고는 남자선배들 옆으로 바싹 붙어 앉는 신입생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캠프파이어 마당에는 타 대학 여학생들을 꾀어서는 꺼져가는 불씨 앞에 모여 앉아 그야말로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 풍경 사이에서 윤희는 무얼 해야 할지 몰라 민박집 마당을 서성였다. 그런 윤희의 모습을 보면서 소연은 담 곁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뒤쫓아 나온 남학생 둘이 소연의 대담함에 ‘오오~’ 환호를 했다.(그러거나 말거나)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윤희에게 내밀자 윤희는 대답대신 고개를 저었다.(이번에는 윤희의 소심함에 남학생이 ‘에에~’ 야유를 했다.) 소연은 남학생들을 향해 ‘조용히 좀 하지.’했고, 남학생들은 깡다구 센 소연이 귀여운지 이때다 싶었는지 실실 웃으며 다가갔다.


  「선배면 어쩌려고?」

  「저런 선배면 학교 안 다니고 만다」


  윤희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소연을 보고 씽끗 웃었다. 소연도 함께 웃었다. 남학생 둘은 서로 눈치를 보다 창피한지 다른 쪽으로 가버렸다. 윤희는 새 담에 불을 붙이고 길게 한 모금 빨아 연기로 둥글게 원을 만들어 내뿜었다.


  「하하, 꼭 도넛 같네…… 어떻게 만든 거야?」

  「야, 너 가증스러워. 다른 데 가서 놀아」


  윤희는 금방 무안하고 새치름해져 고개를 떨어뜨리고 신발 끝만 바라봤다. 윤희의 표정이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신선했을까,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아이가 신기했을까, 소연은 그런 윤희를 빤히 쳐다보다 한마디 했다.


  「어이, 아가짱!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좋아서 어쩔 줄 몰라 배시시 금방 아이처럼 환해지는 윤희. 소연의 뒤를 팔랑팔랑 따라간다. 소연은 윤희가 따라올 수 있게 천천히 걸으며 담배를 한 모금 더 빨았다가 연기를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윤희는 그런 소연의 모습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언제부터 피웠어?」


  윤희는 소연의 입술사이로 새어 나오는 연기들을 보며 말했다. 유난히 긴 손가락과 담배는 참 잘 어울렸다. 윤희는 소연의 손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손톱도 예뻤다.


  「고 1」

  「호기심?」


  순간, 길을 걷던 소연이 멈췄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윤희의 어이없는 호기심이 소연의 마음에 ‘쿵!’하고 돌덩이를 내려놓았다.


  「그냥……. 답답했어. 난 아빠가 없거든. 엄마는 가난이 싫다면서도 당신 손으로 십 원 한 장 벌지 않으셨어!」


  소연은 남의 이야기하듯 담백하게 말했다. 윤희는 왠지 그 기분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상황인가 말이다. 그러나 윤희는 진심이었다. 소연은 그런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날 윤희가 본 소연의 눈과 가늘게 떨리던 손가락은 지금도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면 달라져?」

  「가끔은.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는 어떤 생각도 안 들어. 나는 그래. 생각을 하더라도 툭, 툭, 끊어져…」

  「수업은 어떡하고?」

  「나… 고 2 때 학교 그만뒀어. 검정고시로 대학 온 거야」


  윤희는 늦은 봄인데도 몸이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소연이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일부가 윤희에게 꼭 박혀버렸다. 덜덜덜.


  「그랬었구나!」

  「궁금해? 결손가정의 아이가 어떤 노력으로 대학에 입학했는지? 말해줘도 모르잖아, 너네들은…」

  「왜 그렇다고 단정 짓는데? 그것도 콤플렉스 아닌가. 내가 어디를 봐서 그렇게 싹수가 없어 보이는데? 내가 부자인 거랑 내가 속물이라는 증거는 먼데? 너 같은 애 나도 잘 알아. 미안, 너 같은 애라고 해서. 나는 그냥 너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잖아. 말 좀 함부로 할게. 니네 같은 부류가 더 역겨워」


  소연은 담배꽁초를 버리고 윤희의 얼굴을 노려봤다. 잠시, 윤희의 얼굴이 구겨졌지만 다시 평평해졌다. 소연이 갑자기 터벅터벅 윤희에게 다가와서는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윤희의 코에 자신의 코를 닿게 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희는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눈떠도 돼. 이렇게 하면 너랑 나랑 영혼을 나눠가질 수 있어. 불쌍한 친구 한 명 구제할 수 있지? 잘 부탁한다. 나는 스무 살, 이소연이야」


  윤희는 잠자코 소연의 눈을 응시했다. 알 수는 없었지만 소연에게서는 집시의 냄새가 났다. 소속 계를 떠나 황망하게 떠다니는 명황성에서 왔을까. 두 사람은 그렇게 눈을 넘어 상대의 속까지 깊게 투영되었다. 그리고 진짜 그렇게 되었다. 소연의 부모님은 그녀가 고1 때 이혼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아이스크림은 안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윤희와 소연은 달빛에 흔들리는 강이 보이는 곳에서, 모든 세상이 푸르게 변할 때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었다. 소연이 살아왔던 시간들과 생활들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소연은 한 번도 누구랑 이야기를 했었던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윤희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허물없이 담담하게 고해성사하듯 읊조렸다. 윤희는 소연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윤희가 너무도 당연하게 교복을 입고 수업을 듣는 동안, 소연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윤희가 집에 돌아가 최고의 과외를 받는 동안, 소연은 홍대 근처의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신촌의 만화방에서 활자에 눈을 고정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들엔 할 일 없이 골목골목을 누비며 돌아다녔다고 했다. 엄마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엠티가 끝나고 학교로 돌아간 후, 소연과 윤희는 소연이 떠나기 전까지 일 년 반 동안을 껌과 껌딱지처럼 꼭 붙어 다녔다. 윤희는 혼자서 3학년에 올라갔고 소연은 어디서 돈이 났는지 아니면 등록을 포기했는지 휴학을 했고, 인도엘 갔다 왔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나중에 안 사실은 왕복 비행기 티켓만 끊고 무작정 갔다는 것이었다.


  소연의 취미는 새로 나오는 만화와 비디오를 빼고는 거의 다 봤을 정도로 보는 것에 특히, 영화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윤희는 소연과 떨어져 지내는 동안, 선배랑 밥 먹어 주면 일주일 내내 커피를 사주겠다는 친구의 꼬드김에 나갔던 자리에서 첫 남자가 된 준환을 만났다. 윤희는 소연이 채워준 공간과 소연과 함께한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듯 준환을 거의 매일 만났다.

윤희에겐 소연을 대신해 줄 사람이라면 남자도, 여자도, 친구도, 선배도,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고 그런 스토리의 남자와 여자가 되었다. 윤희의 행동은 점점 대범해졌고 준환은 그녀의 그런 점들을 첫사랑에 빠져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귀엽고 철없는 조금은 무모한 사랑쯤이라고 여겨 크게 문제 삼지 않았고 순수하고 여렸던(아직은 문학소녀였던) 소녀는 그렇게 어른으로 여자로 아름답게 성장해 나갔다. 윤희는 자신도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을(꽤나 섹스에 탐닉한다는) 알게 되었다.

게다가 하루라도 자신이 혼자라고 여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 결론은 준환에게 집착하고 떼쓰고 악쓰는 일로 순환되었다. 소연이 돌아왔을 때도 윤희는 소연을 먼저 찾아가지 않았다. 술만 먹으면 소연을 찾던 윤희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준환은 이런저런 핑계로 윤희를 피하기 시작했다. 윤희는 준환에게 이별 아닌 버림을 받았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방치해 두고 떠났던 소연을 원망만 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소연도 윤희를 찾지 않았다.


  소연은 돌아온 지 한 달 만에 학교에 나가 자퇴서를 냈고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나 저제나 소연의 방문을 기다리던 윤희는 술에 취해(자존심은 개나 줘버리고) 지발로 소연의 반 지하를 찾아갔다. 윤희는 소연의 얼굴을 보자, 참았던 눈물을 봇물처럼 쏟아냈고 이내 온갖 저주를 퍼부었다. 소연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아줬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악담을 다 들어주었다.


  윤희의 악다구니에 알몸으로 자고 있던 지영이 깨어났다. 그제야 윤희는 그 방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지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잠에서 깨, 하품을 하며 ‘조금만 조용히 해주라.’ 했다. 소연을 통해 알게 된 사람이 윤희의 두 번째 남자(온전하게는 또는 형이상학적으로 첫 남자)가 되어버린 글을 쓰는 지영이었다.


  소연은 지영에게 이불을 던져주고 노려보면서 ‘윤희, 괜찮니?’라고 물었고 윤희는 눈물 콧물 범벅을 한 얼굴로 외간남자의 알몸을 보고 놀라 동그랗게 커진 눈을 고정시킨 채 뒤돌아서서 ‘미안해요'라고 했다. 지영은 그런 앙큼한 윤희가 귀여운지 ‘한 번 더 볼래요?' 하면서 소연이 던져준 이불로 배를 가리고 킥킥거렸다.


  소연은 인도에서 사 온 목걸이라며 윤희의 목에 걸어주었다. 울다가 선물 하나에 환해지는 얼굴이라니, 윤희는 역시 윤희였다. 소연은 그런 생각을 했다.


  「미안, 어느 정도 마음의 결정이 끝나면 찾아가려고 했어. 용서해 줘」

  「뭘 결정해? 나랑 상의도 없이 인도에 몰래 혼자 가놓고 이번엔 뭘 또 혼자서 하려고?」

  「그런 거 아냐. 학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다들 취업반이라 정신없는데 나는 무얼 해야 하나 걱정을 좀 했어. 나중에 말해 줄게. 지금은 니 이야기 듣자. 어떻게 지냈어?」


  윤희는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 폴짝폴짝 뛰었고 소연의 목걸이를 만지고 또 만지며 너무나 좋아했고 그런 윤희를 보며 소연도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의 표정을 관찰하던 지영이 소연의 활짝 핀 얼굴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우린 이런 사이야.'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면서 정식으로 윤희에게 지영을 소개했다. ‘인도에서 처음 만났다고, 현재는 같이 살고 있는 남자.'라고.


  소연은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벌었지만 반 지하 단칸방임에도 혼자 살기에는 너무 벅찬 서울의 생활비 때문에 지영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자백했다. 물론,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소연이 가장 누군가가 필요할 때 지영이 나타났고, 여자 혼자 살기엔 서울은 너무 삭막하고 서늘한 곳이었다. 윤희는 소연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모습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점점 셋이서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지영으로 인해 소연과 윤희의 관계가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윤희는 소연과 지영이 이따금 섹스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굳이, ‘쓸쓸하면, 외로우면'이라는 수식어가 아니더라도 아니, 어쩌면 매일 밤 함께 체온을 나누는지도 모른다.


  이 무렵 윤희의 가슴에 준환이 남긴 상처가 자연스럽게 지영에게로 전이되었을까. 지영과 소연은 사랑을 나누는 게 아니고 그저 사람을 나누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쓸쓸해했다. 윤희는 지영과 자신은 섹스만 결여되었을 뿐,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소통하고 있다고 지영과 소연은 섹스만을 나누는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렇게 되자 윤희는 소연을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친구의 애인이나 뺏는 그런 여자는 되기 싫었다. 무엇도 약속한 일이 없는 사이, 그저 옆에 있을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하고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윤희를 보며 지영은 어땠을까.


  타인이 봤을 때, 친구인지 연인인지 구별도 안 가는, 삶의 필요충분조건으로 함께 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해줄 수 있는 것이란 그저 섹스뿐일까. 소연은 윤희가 지영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윤희를 대했다. 그건 어쩌면 소연의 윤희에 배한 배려 또는 소연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삶을 지탱할 에너지를 잃는 일일까.


  소연에게 지영은 그저 한 지붕에서 함께 사는 사람일 뿐이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그렇다 하더라도 윤희에게 한 개도 거짓도 없이 모든 걸 다 말하기는 싫었겠지. 어쩌면 소연 그녀도 여자였을까. 한 개쯤의 비밀은 간직하고 싶었을까. 표면적으로는 아무 고민이나 고통이 없는 나날이었지만 속으로는 곧 곪아 터질 것 같은 그런 나날이었을지도. 셋이 공유한 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너울이 오기 전의 고요함.


  지영이 취사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영은 윤희도 소연도 누구도 멀리하지 않았다. 소연의 집에 계속 머물면서 지영은 윤희와 사귀기 시작했다. 소연을 옆에 두고 윤희와 사귀기 시작한 지영은 어떤 고민으로 번민의 밤을 보냈을까. 그를 움직이는 근원은 무엇일까. 윤희는 자신과 사귀게 된 지영이 스스로 소연의 집에서 나오기만을 바랬다. 채근하거나 따지거나 조르지 않았다. 지영에게만은 어른스럽고 상냥하고 친절하고 우아하고 여성스럽고 그리고 무엇보다 지영의 진심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지영은 소연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윤희는 남자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지영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땐 정말로 지독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지난 일이었다. 윤희는 자신의 일을 관철하는 소연 특유의 기질과 지영이라는 아이를 함께 공유했다는 사실 때문에 소연을 버리지도 어쩌지도 못하며 방황하던 때도 분명 있었다. 소연보다 많은 걸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타인들에 비해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뚜렷하다고 자신했던 윤희는 소연 앞에서 만은 자유롭지 못했다.


  두 사람은 계속 동거를 했고, 지영의 태도도 어딘가 불투명했었다. 지영은 정말로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던 것일까. 소연은 윤희를 위해 중립을 잘 지켜주었다. 윤희는 자신보다 백배는 아름답고 깨끗한 지영의 영혼을 가지고 싶은 열망뿐이었다. 소연으로부터 지영을 빼앗기 위해 타오르는 질투 따윈 없었다. 아니, 억누르고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소연은 윤희가 옆에서 자고 있을 때도 지영과 섹스를 하곤 했다. 그 이유는 무얼까. 소연의 질투였을까.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딱 한번 윤희는 지영과 사랑을 나눈 적이 있었다. 지영의 아이라도 가져야 했을 만큼 지영이 절실했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분명한 소유욕이었다. 지영은 윤희와의 섹스에서 본인도 몰랐던 자신의 욕망과 마주했다.


  소연과의 섹스에선 부드럽고 고요하기만 하던 지영이 윤희라는 여체 앞에서는(윤희는 뱀처럼 지영을 휘어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것은 파괴적이면서 본능이었다.)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윤희만을 탐했다. 윤희는 하얗게 피어나는 지영의 욕망과 영혼을 자신의 몸속에 가두면서 오래도록 사랑을 나누고 나눴었다.


  윤희는 그날, 지영을 가지면 안 되었었다. 소연보다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윤희의 자만심은 지영을 파멸로 이끌었다. 지영이 번민에 휩싸이자 소연은 한 발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봐 주었다. 윤희와의 섹스는 지영을 조금씩 죽여 갔고 지영은 자신의 어지러운 마음 때문에 윤희를 잡지 못했다. 윤희는 힘들어하는 지영을 볼 자신이 없었다. 소연의 세계에서 지영을 구제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지영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소연은 힘들어하는 윤희 때문에 지영에게 ‘윤희와 함께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했었지만, 지영은 아무 말도 없이 네팔로 떠났을 뿐이다. 윤희에겐 떠난다는 말도 없이. 그가 떠났을 때도 소연은 늘 가장 좋은 친구로 윤희의 곁에 남아 있었다. 지영의 증발과 함께 모든 것은 제자리를 잃고 흔들리고 있었다. 윤희는 자신의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며 일방적으로 소연을 피했다.


  지영이 윤희를 구원하지 않고 사라져 버린 후, 지옥에서의 한철을 보내고 있던 윤희에게 재원이 나타났다. 가진 것 하나 없는 재원이 윤희를 구원해 주었던 것이다. 가난 밖에는 가진 게 없었던 재원에게 윤희가 쉽게 몰두한 것도 그들과의 관계 속에서 도망치고 싶어서였다. 삶의 도피처를 찾던 윤희에게 재원의 조건은 묘한 자극을 일으켰고 호기심을 갖기에 충분했었다.


  연락도 못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윤희에게 전화를 걸어 결혼식 때 못 간다며 미안해하던 소연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윤희의 두 번째 남자가 되어버린 지영보다 영혼까지 아름다웠던 소연이 궁금해졌다. 윤희는 전화기 코드를 꼽고 집에서 가져온 아주 오래된 일기장과 수첩들을 펼쳤다. 윤희는 진심으로 소연이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녀의 남은 생만큼은 누가 뭐래도 행복해야만 했다. 지금은 어디선가 행복하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수첩엔 소연과 지영의 연락처가 나란히 적혀있었다.


  그 지하 단칸방이 몹시도 그리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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