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 잊혀지는, 잊어야 할 것들
한동안 서있던 재원은 진희와 마주 보며 천천히 앉았다. 그는 담담해진 그녀를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진희는 그토록 쓸쓸한 얼굴의 재원을 본 게 처음이었다. 아니, 그 어떤 남자에게서도 볼 수 없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만 있었다. 방은 침묵 속에 한껏 가라앉았고, 어두워졌고, 불도 켜지 않아 이젠 서로의 얼굴이 희미해져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을 때, 재원은 몸을 움직여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있는 진희와 나란히 앉았다.
「어젯밤 그녀의 사진을 봤어요」
윤희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고 재원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윤희의 이야기를 잠잠히 듣고 있었다.
「가족사진과 함께 오빠 지갑에 끼워져 있던… 그래서…」
진희는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버리려고… 버리려고 노력했지만, 그럴 수 없었어. 사진이 사진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마치, 지갑의 일부분인 것처럼… 아니, 아냐…」
재원은 얼굴을 들어 진희를 향해 천천히 그리고 정확하게 말을 하면서 목소리는 괴로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 여자에 대해 듣고 싶어요」
재원의 말을 진희가 잘랐다. 이제 진희는 미안함도 없었다.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각오가 담긴 목소리였다. 방안은 더 이상의 빛을 담지 않았다. 어두움 그 자체였다. 그것은 재원의 과거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미래, 학교를 다니며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로는 윤희에게 작은 선물조차 해줄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미련, 그래도, 아무런 불평 없이 그와 함께 했던 윤희였다.
재원은 천천히 한 번도 잊지 않았던 과거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담담하게, 술이 없어도, 기억해 내고 말할 수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여자야. 가족이라고까지 느꼈었어.
아니… 어쩌면… 가족 그 이상이었을 거야」
진희는 어둠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쌀쌀한 밤공기가 조금 춥다고 느꼈다.
「사랑했던 여자였어. 하지만… 그땐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었어. 그녀가 갖고 싶어 했던 것들, 보고 싶었던 영화들, 듣고 싶던 음악들, 함께 하고 싶어 했던 시간마저도, 나는 그게 가슴이 아파. 내가 줄 수 있는 건 오직 사랑뿐이었다는 게… 그건 느껴질 수는 있지만 보이지는 않았어」
재원은 말끝을 흐렸다. 숨을 가다듬고 있었다.
「지독하다 오빠는. 내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숨기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나를 사랑해? 나는 얼마나 사랑하나요? 가슴에선 그 여자와 살면서… 그 여자에게 못해줬던 것들을 나한테 주는 거야? 그래서 그토록 잘해주었던 거예요? 나랑 연애를 하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상대가 필요했던 거 아니에요?」
재원은 가슴이 아파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 줘. 부탁이야…」
재원은 간신히 말을 하고 다시 한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힘겨운 목소리를 듣자 진희는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말해줘. 나 그런 의미밖엔 아니었는지…」
재원은 진희를 사랑하고 있었다. 아니,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희는 쉽게 잊히지 않았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그녀에 대한 기억들에 아직도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아마도 평생 그녀는 잊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진희에게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너를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있어. 시간을 조금만 줘’라고 부탁을 한다면, 스스로도 달라지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을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말해야만 했다.
재원의 마음의 소리가 그녀에게 보였을까.
「……」
재원은 속마음을 꺼내지 못하고 침묵으로 대답해 주었다. 진희는 바닥에 널려있는 윤희의 사진과 편지들, 반지케이스를 재원의 손에 쥐어주었다. 재원은 그런 진희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진희는 재원의 눈을 보며 애원하고 있었다.
「직접 찢어주세요. 한 글자도 보이지 않게… 어떤 사진인지도 구분할 수 없게. 그리고 그 반지도 버려주세요…」
재원은 그녀가 제 손에 들려준 편지들과 사진들을 보았다. 거기엔 여전히 맑게 웃고 있는 윤희가 재원의 슬픈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당신의 지갑 속에 있는 사진도…」
진희는 어디에서든 이런 남자를 찾을 자신이 없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토록 절박했다. 그의 첫 여자는 되지 못했지만, 마지막 여자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의 첫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가슴에 ‘쩌억’ 소리가 났고 금이 갔다. 그 소리가 투명하게 들렸다. 생채기도 없는 심장에서 선홍색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원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손에 들려진 사진과 편지들을 하나씩 찢었다. 지갑 속에 가족사진과 함께 들어있던 사진도 찢었다.
윤희의 웃는 얼굴이 반으로 찢겨졌다. 재원은 연민도 없이 그대로 그것들을 반지와 함께 쓰레기통에 모두 버렸다. 아주 침착하게 그 모습을 진희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재원의 모습이 진희는 무서웠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재원은 다시, 진희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진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분으로 재원의 방안을 주욱, 둘러보았다.
「다행이에요. 새로 이사를 해서… 새 이불도, 새 침대도. 하지만, 이방 어딘가에는 아직도 그녀의 물건들이 숨 쉬고 있겠죠?
정말 그런 것들이 소중한 걸까. 재원은 진희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남은 윤희의 모습은 찢겨 나가지 않은 채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가 사진들과 편지들을 찢은 이유는 그 마음속을 이제는 진희의 것들로 채우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함께 할 아주 오랜 시간이.
「그녀의 결혼식에 갔었어. 그녀와 연락할 수 있는 모든 연락처가 바뀐 지 한 달 만이었어. 처음엔 믿기지도 않았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어. 결혼식장에 가서 다 부숴버리고 싶었어. 내 여자라고 말하고 싶었어. 그녀가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밝히고 싶었어. 그녀가 생일선물로 사준 단 한 벌 뿐인 철 지난 정장을 입고 결혼식장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신부 대기실에서 나오고 있었고 우린 눈이 마주쳤어. 내가 손을 내밀면 충분히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는 만큼의 거리였어.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달라져 있었어. 그녀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어. 잠시 정신이 나간 거라고 그녀의 손을 잡고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래서,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걸 바라지 않았어. 그때,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을 할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아주 명확히 알 수 있었어」
「정말로 사랑했었네요」
「그래… 정말로 진심을 다해서 사랑했었어. 부정하지 않을게」
진희는 재원의 품에 안겼다. 따뜻했다. 이 따스함마저 거짓이라고 해도 좋았다.
「함께 할게요.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지 않아요. 자기 마음속에 아직 남아있을 그 여자보다 더 크게 내가 오빠 속에 자리 잡을 때까지…」
「……」
재원은 ‘고마워’라고 속에 말을 했다. 윤희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 감정은 사랑일까 아니면, 미련과 후회일까. 재원은 진희를 윤희와는 다른 방식으로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었다.
「난 이제 어떡하죠? 난 오빠의 목소리만 들어도 아니, 숨소리만 들어도, 손가락만 만져도, 눈물이 나는데…」
진희의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지만 진희는 눈물을 훔치지도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어쩌면… 자기는 내가, ‘너는, 절대로 아니야,’하며 쉽게 나를 포기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럴 수 없어요. 그건 오빠도 분명하게 알고 있어요. 오빠가 나를 버린다 해도, 아니 나를 버린다면, 나는 내 남은 삶을 오빠만을 간직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어요. 나는 아직 오빠에게 해준 게 없어서 이대로는 헤어질 수 없어요. 내 모두를 내주어 아낌없이 오빠를 사랑한 후라면 우리의 추억을 안고 살아갈 수 있겠죠. 하지만 나는 이제 시작인 걸요. 이제 막 오빠에게 다가섰는데 이대로 몰아내 친다면 나는 너무 슬플 거예요. 나는 아직 홀로서기를 할 만큼 오빠에게 내 사랑을 몽땅 주지 못했어요」
진희는 재원의 가슴에 눈물을 묻었다. 재원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재원은 늘 이 문구를 간직했었다.
윤희는 한 번도 재원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