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기상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나, 나에겐 수많은 융통성이 필요했다. 첫째와 둘째가 돌아가며 아팠고, 먼저 아픈 둘째가 결국 지방 친할머니댁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첫째의 수면 메이트를 대신해 줘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안 그래도 새벽에 곧잘 깨는 첫째를 둘째만 믿고(?) 늘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날 수 있었는데, 계속해서 새벽 4시 30분을 고수할 수 없는 순간이 생겼다.
결국 나는 첫째와 모종의 거래를 했다. 새벽 5시에 먼저 일어난 내가 준비운동을 끝낸 뒤, 첫째를 깨워 내가 운동하는 1시간 동안 원하는 애니메이션을 정해두고 볼 수 있게 한 것이었다(아무리 그래도 아이를 새벽 5시부터 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아, 나의 기상 시간도 조금 늦추기로 했다). 새벽 5시 30분도 되지 않은 시간부터 아이에게 영상 시청을 권장하는 부모라니! 누군가가 보면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행동이지만, 새벽 5시, 4시 30분 불시에 아이가 일어나 방해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새벽 5시 22분,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이는 아이를 깨워 강제로(?) 영상을 보게 하는 날도 있었고, 내가 일어나 방문을 열기가 무섭게 종종거리며 나를 따라 나오는 날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둘만의 작당을 통해 나는 새벽 기상과 운동이라는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고, 첫째는 평일에는 볼 수 없었던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적절한 포기가 필요한 순간, 적당한 융통성이 필요한 순간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새벽 기상과 운동이라는 자기 계발을 해보기로 결심했을 때, 못내 꿈꾼 것이 있었다. '언젠간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지 않아도 마음껏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만큼, 나에게 개인 시간이란 것은 늘 턱없이 부족했다. 억지로 저녁 시간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정신력도 끌어와야 했다. 충분한 수면과 만족스러운 자기 계발 시간이라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기에, 나는 과감하게 약간의 수면 시간을 양보했다. 다만, 언젠가는 새벽 4시 30분에 기상해 아이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여유로운 개인 시간이 왔으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즉, 나에게 '새벽 기상'이란 건 하나의 수단일 뿐이지, 그 자체로의 평생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일 뿐이지, 지금의 나에겐 거의 필사적이었다. 즉, 그 시간이 일어나지 않으면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아직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길 몇 주,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는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조금 주저했다. 한 주 뒤, 둘째가 돌아오면 다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야 하는데, 30분이나 늦게 일어난 뒤 다시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 솔직히 새벽 4시 30분과 새벽 5시는 명사가 갖는 이미지가 너무 다르지 않은가? 새벽 4시는 '아니...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의 이미지라면, 새벽 5시는 '너 참 부지런하구나!'의 궤도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넉넉한 시간이 아닌가?
하지만, 결국 다시금 되새겼다. 내 목표는 그저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새벽에 일어나 여유롭게 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첫째와 며칠간의 동트기 전 시간을 즐겼다. 그리고 그것은, 꽤 나쁘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 나, 턱없이 적은 여유 속 계획은 소중하다
평범한 일과 속 나의 시간은 항상 바쁘게 흘러간다. 몇 번이고 반복하는 나의 일과 읊기. 새벽 4시 30분 기상과 1시간 조금 넘는 운동, 6시부터 시작되는 아침 육아와 8시 출근과 동시에 6시까지의 업무. 퇴근과 동시에 시작되는 저녁육아는 8시 30분이 넘게 계속되고, 9시가 가까워진 후에야 진정한 자유시간이 온다. 나의 자기 계발은 그 커다란 스케줄 속 틈틈이 이뤄진다. 하루종일 앉아 있어 운동 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나의 일상 속 움직임은 걸어서 출근하며 조금씩 상쇄하고, 지긋하게 영어 공부를 할 수 없는 상황상 회사에서 잠깐 여유가 생겼을 때 후다닥 앱을 켜 몇 문제씩 풀고, 퇴근 버스에서는 회사에서 들을 수 없는 리스닝 문제를 푼다. 독서는 이북을 읽으며 해소한다. 나의 자기 계발은 이렇게 매일 속 조각조각 이루어진다.
새벽 기상을 하면서까지 확보해 낸 운동 시간을 제외하면, 나의 대부분의 자기 계발은 한 군데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저녁 시간 남편이 아이들을 봐주고 있을 때, 아니면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나도 잠에 들기 전 조금씩 가까스로 이루어진다. 여유가 없다 보니 항상 머릿속에 계획을 세워 두곤 한다. 오늘 글을 쓰지 못했으니 오늘은 자기 전에 영어 공부 전에 글을 쓰고 자야지. 오늘은 영어 문제를 다 풀지 못했으니 오늘은 책을 좀 덜 읽고 남은 문제를 다 풀어야겠다. 나의 계획들은 늘 예측 불가능한 시간 속에 유연하게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방이 되지 않는 육아 돌발 상황
미취학 아동을 키우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아이들은 왜 이렇게 자주 아플까? 왜 사람은 이렇게 쉽게 뜨거워(?) 질까? 아무리 바빠도 내 일과가 흐를 수 있는 것은 결국 남편과 나, 아이들이 아프지 않기 때문이고, 생각보다 그 흐름은 자주 깨지곤 한다. 올해만 해도 몇 번이나 유행 바이러스로 양가의 신세를 지거나 나와 남편의 급 휴가가 필요해졌으니까. 내가 아프면 건강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할 수 있었지만, 아이들이 아프면 탓할 곳이 없어 그저 서러웠다. 급히 휴가를 쓰느라 회사 동료들에게 아쉬운 말을 하는 것도 서럽고, 지방의 양 부모님들에게 아이들을 맡아달라 부탁드리는 것도 늘 죄송했다. 육아를 하면서, 1년 365일 아무 이벤트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늘 이벤트의 연속이었으니까.
꾸준함이라는 것은 결국 인생의 이벤트도 모두 일과로 만드는 것
육아의 이벤트들은 내게 늘 '홧김'을 만들어 주곤 했다. 아이가 아파 스트레스로 홧김에 과식을 했다. 지난주에 아팠는데 이번주에 또 낫질 않아 홧김에 잘하던 운동을 관뒀다. 타인의 삶에 휘둘리는 것은 명분이 너무나도 충분해 늘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몇 번의 충동적인 행동은 늘 후회를 가져왔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홧김'으로 나의 자기 관리를 포기하기엔 이벤트는 너무나 자주 찾아온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결국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닌, 각종 사건사고에도 의연하게 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끔 아플 수도 있지. 가끔 다칠 수도 있지. 갑작스레 부모님께 신세를 질 수도 있는 법이지. 약간의 스트레스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 또한 나의 일상 속 하나라고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둘째가 아프고, 곧이어 첫째가 아프기 시작하고, 눈치를 볼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지만, 확실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일과는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며칠간의 5시 기상. 다시 모든 나의 아이들이 한 곳에 모이면, 난 다시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 비로소 행복감을 느낄 것이다. 다시 나의 일과가 찾아왔다고. 하지만 가끔씩 5시에 일어나야 하더라도, 또는 새벽 기상도, 새벽 운동도 하지 못할 정도로 너절해지더라도, 난 다시 일과를 되찾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과 육아가 함께하는 '내'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