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주의자의 까르페 디엠>
대학교 1학년 때 몇 주간의 극심한 복통으로 포항에 있는 응급실에 갔다.
그곳에서 대장암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올라가는 부모님 차에서,
그 다섯 시간 동안 나도 세상과 작별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대장암은 아니었다. 궤양성 대장염 진단을 받았고, 추후에 크론병으로 확진을 받았다.)
그 이후로, 내 삶의 기준은 완전히 달라졌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물을 한 모금 마시려 해도, 길거리에 있는 공중화장실에서 나오는 물을 마실게 아니라면 돈이 필요하다.
살아 있는 동안은 뭘 하나 하려면, 무조건 돈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까르페 디엠, 지금을 즐겨라!'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과연 살날이 아주 많이 남았다면, 그 말이 여전히 맞을까?
죽고 나면 상황은 완전히 반대다.
죽은 사람에게는 돈이 필요 없다.
병원비나 장례비, 화장 비용은 죽기 전에 필요한 돈이고, 그 순간이 지나면 조 단위의 돈도 아무 의미가 없다.
살아 있을 때는 모든 게 돈으로 연결되지만, 죽고 나면 단 한 푼도 쓸 일이 없다는 게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는 건 어떨까.
돈과는 상반되게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시간은 더 귀해진다.
어릴 때는 누구나 자신이 오래 살 거라 믿는다.
그래서 공부를 하고, 돈을 모으고, 미래를 계획한다.
하지만 수명이 6개월 정도 남았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면,
아무리 모범생인 고3 학생이라도 수능을 대비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그땐 미래 대비가 의미 없음을 알기에,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혹은 두려움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천문학적인 부를 쌓은 사람이라도, 죽기 직전 가진 전부를 내놓고 다시 어린 나이가 될 수 있다면
그렇게 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돈의 가치는 희미해지고, 시간의 가치는 점점 더 선명해진다.
결국 '지금을 즐겨라'와 '미래를 대비하라'라는 말은 서로 모순처럼 보이지만, 둘 다 맞다.
살아가는 데에는 돈이 필요하니 미래를 준비해야 하고, 수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지금을 즐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가정하고 산다.
내일 죽을 수도 있고, 1년 뒤에 죽을 수도 있고, 50년 뒤에 죽을 수도 있다.
심지어 상상이상의 과학 발전으로 죽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모두 가정한다.
만약 매일을 다그치며 미래만 대비한다면, 갑자기 죽는 순간 그런 식으로 살아온 날의 후회를 남길 것이고
반대로 매일 즐기며 산다면, 오래 살아 버렸을 때 비참한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실제 인간의 영생을 탐구하는 회사가 있다.)
치과의사들 사이에는 '원생마'라는 은어가 있다.
갑자기 원장실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치과의사들이 있다.
이유는 다양하다.
치과 운영 문제로 비관해서 스스로,
치과 운영 스트레스로 인한 급사,
은퇴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평생 진료하다가,
손주의 아파트까지 마련해 주겠다고 욕심껏 버티다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원생마’라는 단어엔 여러 사정이 담겨 있지만, 나는 그 말이 씁쓸하다.
죽는 순간 어떤 후회가 남을지를 생각하면, 좁은 치과 원장실에서의 죽음은 원치 않는다.
내가 원하는 죽음은 단순하다. 갑자기 죽어도 후회가 없는 죽음이다.
물론 내일 갑자기 죽는다면 후회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적게 남기고 싶다.
오늘이 정말 즐거웠다면, 내일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오늘 힘들었지만 보람찼다면, 영원히 살 미래를 잘 대비했다고 생각한다.
오늘이 불만족스러워도,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꽤 괜찮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나는 지금을 낭비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그 중간쯤의 삶을 살고 싶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든, 그건 각자의 자유다.
죽음을 떠올리며 사는 게 불편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것이 삶의 균형을 잡는 나만의 방식이다.
가끔은 나다운 장례식도 상상해 본다.
맛대가리 없는 편육과 차가운 파전, 간도 안 맞는 육개장 대신
1. BBQ 황금올리브 후라이드 치킨 (뼈)
2. 교촌 허니 & 레드 치킨 (순살)
3. 엽떡에서 파는 엽기 오뎅 (착한 맛)
4. 기름 뚝뚝 떨어지는 한우 차돌박이가 새콤 매콤한 파절이와 함께 무한 리필로 놓여있고,
5. 육개장은 농심 육개장 사발면 (작은 컵)으로 대체한다.
6. 후식은 크라운 제과의 새콤달콤 젤리 (딸기맛, 포도맛)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떠올리며 웃을 수 있는 자리.
그렇게 내가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을 마음껏 같이 먹고 가는 장례식이면 좋겠다.
치과에서 우리들끼리 (치과의사, 직원, 가끔 환자분께) 쓰는 말 20
환자 관련
1. 리퍼를 해야 할 것 같은데요.
- 여러 가지 이유로 상급 병원으로 전원을 고려하자는 말이다.
2. 환자분 전신 질환 있어요.
- 환자 전실 질환 체크해서 치과 치료 가능 여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말이다.
3. 골다공증 주사 맞은 환자예요.
- 골다공증 주사 맞은 환자는 발치나 임플란트 할 때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서 치료 계획 세울 때 주의 해야 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