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으로 향하는 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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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하며 가장 깊이 배운 것은
‘숨은 단순한 들숨과 날숨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숨은 몸과 마음을 잇는 다리이자,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언어다.
들숨은 세상으로부터의 ‘받음’이고, 날숨은 세상으로 향한 ‘나눔’이다.
그 두 흐름 사이에서 나는 나를 만난다.
숨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삶의 결이 달라진다.
근골격이 아프거나, 오장육부가 피로할 때 우리는 병원을 찾는다. 하지만 “숨이 약해서 병원에 간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다. 몸에서 눈 하나가 떠나도, 다리가 떠나도 생은 이어지지만, 숨이 떠나면 생명은 멈춘다.
숨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깊은 존재의 근원이다. 이제 숨의 존재를 자각하며, 그 숨과 ‘친해지는 일’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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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나(Prana)’는 산스크리트어로 ‘생명의 기운’을 뜻한다.
그 기운은 공기만이 아니라, 햇살, 물, 음식, 대화, 그리고 감정 속에도 스며 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생명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리고 길게 내쉰다는 건, 내 안의 막힘과 긴장을 비워내는 일이다.
요가에서 말하는 프라나야마(Pranayama)는 ‘숨을 다스리는 법’이 아니라 ‘생명을 의식하는 법’이다. 숨을 조절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운의 흐름을 알아차리는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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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들어올 때,
흉강은 넓어지고 복부는 부드럽게 열리며 몸 안의 공간이 확장된다.
숨을 들이마신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숨이 나갈 때,
그 확장된 공간은 서서히 길로 변한다.
내 안에서 일어난 생명의 리듬이 세상으로 흘러나가는 통로가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숨은 공간과 길의 순환이다.”
들숨은 나를 확장하고, 날숨은 나를 세상과 잇는다.
그 길이 막히면 마음은 조급해지고, 그 길이 열리면 마음은 잔잔해진다.
숨은 나와 세상을 잇는 가장 오래된 다리이자, 삶이 흘러가는 가장 자연스러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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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나무를 보며 호흡을 배운다.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서 있지만, 바람에 따라 유연하게 흔들린다.
숨도 그렇다.
억지로 붙잡을 수 없고, 억누를 수도 없다.
그저 흐름에 몸을 맡기는 순간, 숨은 자연스럽게 나를 이끈다.
프라나야마의 순간은 그래서 아름답다.
그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포용의 상태다.
‘숨이 나를 쉬게 하는 순간’을 만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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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을 하다 보면,
어느 찰나에 숨이 멈추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은 정적이 아니라, 생명력이 가장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그 짧은 무(無)의 공간 안에서 나는 나의 내면을 마주한다.
생각과 감정은 흘러가고 존재(?)만 남는다.
“프라나가 고요하면 마음도 고요하다.”_하타요가 프라디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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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의 시간은 호흡의 길이만큼 깊어진다.
숨을 들이쉬며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고,
내쉬며 어제를 놓아준다.
프라나야마는 나를 새롭게 만든다.
몸을 깨우고, 감각을 연다.
그리고 나의 숨이 누군가의 숨과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연결을 느끼게 한다.
수련은 그렇게 이어진다.
몸의 숨에서 마음의 숨으로,
개인의 숨에서 관계의 숨으로.
오늘 나는 조용히 호흡한다.
숨은 여전히 들고, 나가고,
그 사이에서 나는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