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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signer MYO Mar 31. 2019

Book 15. <괜찮아, 안 죽어>

아직도 자라고 있는 시니컬한 '어른이'의 좌충우돌 성장 에세이 - 김시영

열다섯 번째 책.

괜찮아, 안 죽어

저자 김시영 / 21세기북스 / 2019.03.15


이런저런 사연과 상황이 10년 전 나를 이 동네, 이 작고 조용한 진료실로 끌어다 놨다. 그런데 10여 년간 응급실을 정신없이 뛰어다시며 축척되었던 아드레날린은 그저 집에서 좀 쉬면 좋아질 할매들의 콧물감기를 상대하기엔 너무 과한 것이었다 보다.


평화롭다 못해 적막할 지경인 동네 의원 진료실에 앉아 있다 보니 조금은 우울했고, 약간은 허무했으며, 무척이나 심심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다가온 좌절과 무기력은 쉬지 않고 내게 '그냥 도망쳐!'라고 속삭였다.

- 8p -



"할매."

"왜?"

"괜찮아, 안 죽어요."

진료실을 나서려던 할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인사를 하시려나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마주 보는데 할매가 말한다.

"다 죽어, 사람은."

- 12p -



오래 살라는 인사...

40년 조금 넘게 살아온(이 역시 짧은 시간은 결코 아니지만, 암튼...) 나에게 이 인사는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 이건 사실 인사라기보다 나이를 한참이나 먹은 노인들의 소원과도 같은 기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덧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너무도 적은 그들에게, 내게는 당연한 '다음의 만남'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들에게 '오래 살라'는 인사는 거창한 소원이나 기도라기보다 그저 '내일 또 만나요'와 같은 평범한 진짜 인사인지도 모른다.

- 62p -



"환자한테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그러지 마. 하고 싶은 거 먹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재밌게 살다 죽는 게, 먹고 싶은 거 힘들게 참으면서 오래 사는 거보다 백배는 더 좋아. 그니까 나 맥심도 마실 거고, 떡도 먹을 거야. 커피 달달하게 타서 백설기하고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르지?"


나는 신경과 전문의가 아니라서 치매에 대해 잘 모른다. 아무튼 할매의 말을 듣고 보니 치매 증산 가운데 '솔직해짐'이라는 증상이 있는가 싶다.

- 74p -



할매들의 귀가 잘 안 들려 몇 번씩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면 나도 모르게 인상이 써지고, 아이 같은 할배가 내 사소한 고집에 삐치면 나는 그보다 딱 세 배 더 삐친다.


나는 아직 나쁜 의사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덜 나쁜 의사가 되고 싶고, 또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평생 걸리는 아주 긴 숙제일지라도 나는 그 숙제를 감사한 마음으로 해 볼 생각이다. 이게 나에게 주어진 행복한 미션이라 믿으면서 말이다.

- 109p -



심장이 멈추고 의식이 사라진 환자를 원래대로 돌리는 것 만이 사람 살리는 일의 전부가 아님을, 그리고 너무나 재미없고 심심해서 속 쓰림과 불면증을 가져다주었던 나의 일상이 결국 나를 지켜주고 있음을 아주 오랜 시간 지나서야 조금씩 깨달아 가고 있다.

- 123p -



"알지도 못하는 내가 걱정해서 뭐해. 원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그러게 말이다. 할매 말처럼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야 하는 '내 일'이다. 내가 고민하고 물어보고 찾아보고 약도 바꿔 가며 다시 확인해야 할 나의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동일한 액수의 돈을 받지만 누군가에게는 그저 어떻게 하면 꼬투리나 잡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고, 누군가에게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좋아지게 만들 수 있을까 끝없이 고민하게 된다. 같은 돈을 내고 누군가를 그저 꼬투리를 못 잡을 정도의 서비스만 제공받고, 누군가는 무지막지한 고민과 노력의 결과물에다 추가로 그 분야의 전문지식과 함께 애정을 받는다.

- 244p -



그러나 이런 고마운 전화에도 깜짝 놀라 당황했던 나의 지질하고 좁아터진 마음에 대해서는 끝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전화를 돌린다는 직원의 말에 '아! 이 노인네 또 뭐 해달라고 전화를 한 걸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 미간을 찌푸리던 나의 경솔함에 대한 사과도 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겨우 한다는 짓이 그 미안한 마음을 이런 어설픈 글자 몇 개로 지껄이는 것뿐이다.

- 24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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