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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Jun 02. 2024

선택이 어려운 당신의 세 가지 특징과 해답

실패한 선택은 새로운 선택의 밑거름이 된다

유난히 선택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꽤 많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에 속했고 내 친한 친구들은 나보다 조금 더 하다.  

얼마나 선택을 어려워했냐 하면 한 번은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는데, 술 마시러 어디로 갈지를 선택하지 못해 30분 넘게 같은 거리를 반복해서 돌아다닌 적도 있다.

결국은 어느 가게에 들어갔지만, 그곳에서 술 마시면서 보낸 시간보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고민했던 시간이 더 길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땐 황당해서 서로 한참을 웃었다.


그때 그렇게 오랜 시간 거리를 헤맸던 이유는 나도 내가 먹고 싶은 게 뭔지 몰랐고, 친구들도 그들이 뭐가 먹고 싶었는지 몰랐으며, 이런 혼돈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섣불리 선택했다가 그 집 음식이 맛없으면, '니가 선택했잖아!' 하는 비난을 -비록 장난스럽다 하더라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눈치 게임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만날 때마다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 우리는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한 사람씩 순서대로 돌아가면서 어디 갈지 선택하기로.

그렇게 들어간 가게가 맛있으면 '잘 골랐네.' 건조한 감사의 인사를, 그 반대일 경우엔 미스트처럼 촉촉한 친구들의 침이 얼굴에 스며들 때까지 원망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 마침내 우리는 어느 정도 맛이 보장된 '평타 치는 가게' 몇 군데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제는 특별히 먹고 싶은 게 딱히 떠오르지 않거나 가고 싶은 곳이 없으면 '평타 리스트'의 가게로 자연스럽게 향한다.

모임의 장소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하지만, 앞서 소개한 모임 장소에 대한 에피소드는 일부분에 불과하고, 여전히 우리는 선택이 쉽지 않다.


어느 날 나는 이런 '힘든 선택'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내 지난 경험과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인터넷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누군가의 고민의 흔적들을 살펴보며, 선택을 힘들어하는 동지들을 분석해 봤다.

그리고 그들에겐 크게 세 가지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택에서 우선시 되어야 할 기준을 모르거나,

선택의 주체자인 나에 대해 잘 모르거나,

반드시 정답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완벽주의.


누군가는 세 가지 특징 모두에 해당될 수도 있고, 하나만 해당될 수도 있다.

어쨌든 선택에 방해가 되는 특징들을 알았으니, 어떻게 하면 이런 방해물을 극복하고 보다 편하게 현명한 선택에 다가갈 수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첫째, 선택에 앞서 우선 그 기준이 될 주체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

내게 선택권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내가 그 기준이 되는 건 아니다.


모임을 주최하는 사람은 나지만, 그 모임의 이유가 생일인 친구의 서프라이즈 파티라면?

생일파티 장소와 선물의 선택권은 내게 있지만, 그 기준은 생일을 맞이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

만약, 친구가 회를 못 먹는데 내가 갑자기 회가 당겨서 횟집을 생일 파티 장소로 잡거나, 친구는 세상에서 책 읽는 걸 가장 싫어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 있어서 생일 선물로 결정한다면? 그런 선택은 안 하는 것만 못하다.

내가 가족의 가장 혹은 모임의 대표일 때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놓인 선택지가 구성원의 이익에 중점을 둬야 하는지, 내 개인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인지를 항상 먼저 파악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내가 선택권을 가졌으니 무조건 내 마음이라고 단순하게 판단해서 일을 망치는 경우는 의외로 많다.

그러므로 내 앞에 선택지가 놓였을 때 가장 먼저 그 선택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그 주체의 기준에 맞게 선택을 진행해야 한다.



두 번째, 나를 알아야 한다. 

만약 선택의 주체가 나라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관심은 많으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선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나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막상 어떤 선택지를 마주했을 땐 내가 뭘 원하는지 몰라서 선택을 못할 때가 많았다.

특히 직장이나 진로처럼 미래의 방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선택 앞에선 더욱더 그러하다.


이런 현상에는 어렸을 때부터 계속되어 온 주입식 교육에도 원인이 있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생각할 기회보다는 다수가 정답이라고 여기는 것을 선택하도록 배우며 자라왔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내는 문제는 나만의 공식이 아니라, 미리 누군가 정해놓은 공식대로 풀어야 정답이다.

가정에선 '엄마 친구집 애는 서울대 간다던데, 다른 집 애들은 벌써 결혼해서 애가 초등학교 간다던데'..로 이어지는 정답지를 보여주면서 암묵적인 압박을 가한다. 그 정답지 대로라면 내 삶은 '오답' 투성이다.


이렇듯 우리는 스스로가 어떤 것에 적성에 맞고 경쟁력이 있는지 생각할 시간보다 타인의 속도와 위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도록 강요받으며 자라왔다.

그렇게 성인이 되고 난 후에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루의 많은 시간을 스마트폰 안에 가둬둔다.

그 속에는 수많은 타인의 정답지가 있다.

스마트폰 밖의 나는 그저 평범한 데, SNS 속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예쁘고 행복하기만 하다. 삶의 수많은 단면 중에 가장 이쁘고 행복한 것만 담은 게 SNS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 속의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가끔은 내 삶을 살고 있는 건지, 타인의 세상 속 조회 숫자의 일부로 살고 있는 건지 헷갈린다.

그 속의 주인공이 오늘 어떤 기분이었고, 어제 무엇을 먹었고, 그저께 어디에 갔었는지는 세세하게 기억하면서 정작 내가 오늘 아침에 먹은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는 데는 한참이 걸린다.


그렇게 타인의 삶. 다른사람들이 보기에 좋은 것에만 길들여지면 내 안의 목소리, 내 마음속 나를 인식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환경에 따라 쓸모없는 것들이 퇴화되며 진화하는 생명체처럼.

그래서 온전한 자신만의 선택이 힘들다.

분명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인데, 내가 진짜 원하는 나에 대해 알 기회가 없다 보니 세상의 기준에 자신의 선택을 맡긴다.

그러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에게 맞는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자각하며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한다.  


이젠 타인의 삶, 타인의 기준, 타인의 SNS에서 눈을 떼고, 자신의 지난 삶의 스크롤을 올려보자.

내 갤러리의 사진 혹은 어딘가 끄적거렸던 과거의 내가 남긴 기록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이럴 때 내가 행복을 느꼈구나, 기뻤구나, 슬펐구나, 우울했구나.

지난 자신의 삶에 '좋아요'를 눌러주고, 그 추억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빅데이터를 만들어 보자.

나에 대한 빅데이터가 많을수록, 선택은 나에게 더 가까워진다.


당장 오늘부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등한시해서 서먹해진 나와 다시 친해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완벽한 선택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선택이 어려워 자꾸만 뒤로 미루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완벽주의적 성향이 있다.

이 선택은 과연 완벽하게 옳은 것일까?

온갖 경우의 수를 따지다 보면, 그 경우의 수가 또 다른 경우의 수를 낳고, 또 다른 경우의 수는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변수를 무한생산 한다.  

물론, 신중함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나친 신중함으로 선택의 기회마저 날려버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지금 나의 선택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불안함과 선택의 결과가 좋지 않을 때 주위에서 쏟아질 질책 혹은 평가가 두려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만 머물게 된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서 '적어도 실패는 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면 앞으로 선택을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회피하는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보면 훗날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을 땐, 틀릴까 봐 아무런 답을 쓰지 않은 백지만 손에 남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백지를 손에 들고, '아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실패하진 않았어'하고 진심으로 만족한다면 회피를 택한 것 또한 자신만의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쨌든 자기만족이니까. 그런 선택도 존중받을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백지를 손에 들었을 때, '아.. 일단 아무거나 적어서 제출할걸.. 그랬다면 적어도 내가 적은 답이 맞았는지 틀렸는지 알게 되고, 다음에 같은 상황을 맞이했을 때 또 다른 답을 적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뭐라도 선택할걸..' 하는 아쉬움에 몸부림치게 된다면 그것만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미 내게 주어진 인생은 다 지나가고,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인 상황이라면 그 절망감은 상상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 상황에 빠지기 싫다면 지금 당장 손에 검은 사인펜을 들고 선택지 중 하나에 과감하게 마크를 하자.

그 선택이 행여나 자신이 원했던 것과 다른 결과로 이어진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이 뭔지는 알게 되는 경험이 된다. 그것만으로도 선택의 가치는 있다.

아무리 잘못된 선택이라도 한 번의 선택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다.  

아직 살아갈 날이 남아있는 한 또 다른 선택의 순간은 반드시 다시 찾아오게 마련이다.

비록 언젠가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원하지 않았던 결과를 맞이한다고 하더라도, 그 경험은 미래의 새로운 선택 앞에 보다 현명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므로, 실패한 선택에 빠져 자책하기보다는 오히려 철저한 복기가 중요하다.

시합에서 패배한 바둑기사는 그 과정을 신중하게 복기한다.

복기를 통해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악수를 찾아낸 선수는 다음 시합의 승률을 더 높일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한 실패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비록 선택에서는 실패했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소중한 경험이 된다.  

그런 경험이 많을수록 우리는 우리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스스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훗날 더 중대한 선택의 순간에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선택이 어려운 사람들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 봤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는 말처럼. 작은 선택이라도 여러 번 경험해 본 사람이 더 잘할 수 있다.

선택의 순간에 너무 가까이 서있으면 이번 한 번의 선택과 결과가 전부인 거 같지만,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바라보면 하나의 선택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러니까 용감하게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선택하자. 세상에 완벽한 선택은 없겠지만, 수많은 선택의 경험들이 쌓이면 당신의 인생은 자신만의 완벽에 점차 가까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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