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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임 May 29. 2024

정말 당신의 선택이었습니까?

무의식 관성의 법칙 - 브레이크 고장 난 무의식의 폭주

이번 에피소드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스포가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안나. 

이번 에피소드의 첫 번째 줄에 언급했듯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그 '안나'가 맞다. 


안나는 기차역에 서있었다.

그녀는 극심한 불안과 혐오, 슬픔에 빠져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잃더라도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녀의 바람에서 점점 멀어질 뿐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심리적 코너에 몰렸다.

그녀를 괴롭히는 수많은 생각들은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진 이유는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냈고, 그 순간 그녀는 브론스키와 처음 만난 날 목격했던 기차에 깔렸던 사람의 모습을 떠올린다.


기차가 다가오는 철로 옆에 섰을 때 그녀는 성호를 긋는 몸짓을 했다.

그때 불현듯 그녀가 지금까지 치우쳐 있던 어두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한줄기 빛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은 다가오는 기차 속으로 그녀의 몸을 밀어 넣는다.

안나는 달리는 열차 사이로 던져졌고 그 찰나의 순간에야 정신을 차린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무엇 때문에?'

하지만 이미 늦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사이 벌어진 상황에 공포감을 느끼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그녀의 삶은 허망하게 끝이 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 장면에 나는 같은 페이지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작가가 실제 자살을 경험한 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걸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그 상황의 디테일함은 충격적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뉴스를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반응한다.

'죽을 각오로 더 살아볼 생각을 해야지.' '왜 자살을 하는 거야?' 등등.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이 부분을 읽고 난 후,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과연 저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목숨을 끊은 게 맞는 걸까? 혹시 안나처럼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폭주하는 감정을 연료로 달리던 무의식의 관성으로 인해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죽음으로 던져진 게 아닐까?'


안나와 같은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겠지만, - 경험했다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도 못했을 테니까 - 우리는 가끔 비슷한 순간을 경험하기도 한다.

멍하니 어떤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잠깐만, 내가 왜 여기에 왔지?' '뭘 가지러 왔더라?' 하는 경험 말이다.

안나의 극단적인 선택에 비할바는 아니겠지만, 과한 생각에 빠져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점은 같다. 어떤 생각에 너무 치우친 나머지 현실적 감각이 잠깐 마비되고, 그 사이에 무의식은 내가 하던 생각의 방향으로 내 행동을 결정해 버렸다. 정신을 차렸을 땐 지금의 행동이 온전한 나의 선택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점은 우리는 다행히도 금방 행동을 교정할 수 있는 수준에서 그쳤다는 점이고, 안나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에 가서야 상황을 인지했다는 차이다.

그녀의 지속적인 생각의 방향이 그녀의 무의식을 그쪽으로 이끌었고, 될 대로 되라고 자포자기하는 마음은 그 무의식의 행동을 통제할 브레이크를 느슨하게 만들어 버렸다.


단순한 예를 들었지만, 가끔 누군가가 과거의 어떤 선택에 대해 '아.. 그때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지..'하고 후회하는 것도 같은 상황이다.  

갑작스러웠던 연인과의 이별 혹은 잘 다니던 직장이나 학교를 그만두는 것처럼 일상의 흐름을 바꿔버릴 수 있는 큰 선택 앞에서 우리는 의외로 온전한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주위의 말에 너무 휩싸여서, 혹은 안나처럼 자신만의 생각이나 감정이 잉태한 과장된 생각의 흐름에 의해. 너무도 어이없게 중요한 선택을 해버렸다는 후회.

분명 내가 한 선택이지만, 내가 한 게 아닌 거 같은 선택.

우리를 후회하게 하는 기억의 대부분은 이런 상황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쉽지 않은 문제를 마주했을 때, 그 문제에 대해 깊고 신중하게 생각하는 건 좋지만 그 생각에 먹히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고민에 지나치게 빠져든다는 판단이 들면, 아예 그 일과 전혀 상관없는 다른 행동으로 생각과 의식 사이에 틈을 만들어 줘야 한다.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공원의 어르신들처럼 팔을 휘두르거나 운동을 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처럼 현실 속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행동을 끼워 넣어야 한다. 과한 생각의 영역과 선택의 영역을 분리해야 한다.

고민과 생각의 시간에 데드라인을 정하고, 모든 선택은 데드라인 이후에 하도록 한다. 지나친 자기 생각과 감정의 짐을 옆에 살짝 내려놓은 후에.

가능하다면 그 선택 이후에도 이 선택이 온전한 내 의식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지나친 생각의 폭주로 인해 망가진 제동거리의 흔적인지 다시 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좋다.


만약, 안나가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뭔가에 홀린 것처럼 달리는 기차 곁으로 가기 전에 잠깐 근처의 벤치에 앉아서 커피라도 한 잔 마셨다면. 아니면 계속 이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끊을 수 있는 다른 행동이라도 했었더라면 그녀의 삶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잠깐의 휴식이 그녀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다른 해결책을 찾았을 수도 있다. 

총 3권으로 출판된 안나카레니나가 4권이 되었을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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