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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두니 Jul 05. 2022

오래된 물건

물건을 오래 쓰는 편이다. 잘 못 버린다는 말이다.

결혼할 때 식탁 세트를 사지 않았다. 의자만 4개 샀다. 결혼 전에 아빠가 하얀 페인트를 칠해주신 테이블을 책상으로 사용해 왔었다. 그 하얀 책상이 좋아서 신혼살림으로 가지고 왔고 그때부터는 식탁으로 사용했다.


들여온 시기가 다르면 내놓는 시기도 제각각이다. 세월이 지나니 물건도 나이를 먹는다. 의자보다 더 오래된 식탁은 자연히 먼저 낡았다. 시간의 때가 묻어 더 이상 새하얗지 않았고 점점 애물단지로 보이기 시작했다. 새로 장만할 시기가 된 거다. 허여멀건해진 식탁은 스티커를 붙여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뭐든 짝을 맞춰 사야 해!'라고 되뇌며 새 식탁 세트를 샀다.


멀뚱히 남은 의자 4개는 집안 곳곳에 다른 용도로 배치됐다. 그중 2개는 내 책상 의자로 쓰기로 했다. 책상이 막 필요하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의자는 있으니 당연히 책상만 새로 샀다. 시작이 어긋나니 계속 아귀가 맞지 않았지만 그런 언발란스가 은근 마음에 들기도 했다. 구색을 맞추고 정해진 대로 쓰기보다 비효율적이더라도 필요한 만큼만 소비한다는 뜻 모를 자부심도 있었음이 분명하.


신혼 때 들여온 식탁 의자는 책상 의자의 사명을 띠고 지금까지 엉덩이를 받쳐주고 있다. 며칠 전, 책상에 앉아 있는데 의자 모서리에 닿은 다리가 눌리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다리 무게로 인한 압력이 아니라, 강도가 좀 더 센 통증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아! 20년 넘게 쓴 의자의 가죽이 찢어져 있었다. 나달나달 해어진 가죽 사이로 MDF 합판의 거친 직각 모서리가 비집고 나와 배시시 웃고 있었다. 의자가 수명을 다한 것이다. 탄식이 나왔다. 그러면서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 세월을 지냈으니 해질 만도 하지. 같은 세월을 함께한 남편에게 의자의 운명을 알렸다. 의자는 현관에 내다 놓았다.


그날 저녁이었다. 오호, 통제로다. 내가 놓친 것이 하나 있었으니, 물건을 잘 못 버리는 나보다 한 수 위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의자를 물끄러미 보던 남편이 한 마디 흘렸다.

"의자 상판만 바꿔서 쓰면 되지 않나?"

"아, 됐어. 지겹지도 않나? 상판이고 뭐고 구질구질해! 그냥 버려!"라고 말하는 게 인지상정이건만..... 나도 참,

"오오? 그거 괜찮겠는데? 프레임은 아직 멀쩡하니까."라며 반색했으니 원.


그리하여 오늘, 폭염경보가 울린 이 땡볕 대프리카의 중심에서 살짝 쌔리삐딱한 곳에 위치한 서문시장을 찾았던 것이었더랬다. 이 얼마만의 방문인가. 서문시장은 뭐니 뭐니 해도 섬유, 즉 패브릭의 천국이다. 언젠가부터 내 안에 까탈스럽게 자리한 색채 감각은 다 서문시장에서 패브릭 구경을 하며 돌아다닌 덕이요, 탓이다.


필요한 천의 전반적 분위기를 인터넷으로 사전 조사한 다음 이 레퍼런스를 가지고 시장을 돌며 눈에 들어오는 천을 고르는 일련의 과정들은 정말 고되지만 무지 재미있다. 커튼, 쿠션, 베갯잇 등 우리 집에서 비교적 간단하게 천을 갈아 끼운 것들은 거의 서문시장 출신이다. 같은 피를 물려받은 동생과도 어지간히 돌아다녔었다. 한때 그랬다. 그 시절 선명했던 커튼과 쿠션들이 지금은 희끗희끗 무늬도 잘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그만큼 오랜만에 간 거다. 예쁜 천을 구경하 눈이 마구 돌아갔다. 집을 꾸미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천의 무늬와 색감 자체를 좋아하는 유형이다. 예쁜 천을 발견하면 되게 능숙한 사람처럼 만져보고 재질과 가격을 묻고 뭔가를 가늠하듯 고개를 끄덕대다가 다음 가게에 간다. 한 바퀴 다 돌고는 마음속에 찜해 둔 천을 다시 보러 간다. 두 번째 봤을 때도 마음에 들면 그걸 고른다. 너무나 예쁜 천을 보면 굳이 쓸 데도 없는데도 홀린 듯이 지갑을 연다.


오늘도 미싱의 대가인 양 "이걸로 할게요!"를 외쳤다.  

"얼마나 드려요?"

"한 마요."

가게 주인은 허탈한 얼굴이었다. 나도 나름 민망했지만 어쩌랴. 마음에 드는 천은 하나만 있는 법이 없다. 그 옆에 있는 다른 천에도 미련을 못 버리고 만지작거렸다.

"아, 이걸로는 치마 만들면 진짜 예쁘겠다!"

"만드시면 되죠."

"제가 재봉을 못해서.... "

그러면 주인장은 다시 헐~ 하는 얼굴이 된다.


꽃무늬 천 한 마를 떼고 나서야 애초에 목적이었던 인조가죽 가게를 찾아 나섰다. 용케 찾았다. 의자 커버에 쓸 거라고 하니 재질은 정해져 있고 색상만 고르면 된단다. 샘플에서 아이보리 색을 골랐다. 무거운 인조가죽 두루마리를 찾아 찾아 끙끙대며 끌고 나온 주인장. 다시 반복이다.

"얼마나 드려요?"

"한 마요."

어째 째려보는 것 같다. 미안해서 괜히 이것저것 말을 붙였다. 깍듯이 인사하고 얼른 빠져나왔다.


천 쇼핑이 끝나고 이것저것 장을 보고 집에 왔다. 이제 한 마씩 떼 온 꽃무늬 천과 인조가죽 천을 어떻게 마무리를 할 지만 남았다. 예전 같으면 그날 바로 수선집에 맡기거나 손바느질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그냥 보는 것으로 족하다. 덩그러니 놓여있는 천을 보니 기분이 좋다. 예쁜 천을 뗐다는  것이 다른 쇼핑과는 다른 기쁨을 준다. 좋아하는 색채를 수정체에 잔뜩 통과시킨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할 수 있으니 얼마나 축복인가. 천 한 마의 행복이다.


오래된 의자는 새 인조가죽 옷을 입고 새 의자로 태어나겠지.

한 마짜리 조각 천은 화장대 옆 낡은 가리개를 대신해 시원하게 나폴대겠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물건들이 간간이 새 옷을 입고 기분을 낸다. 

집이 좋아하니 같이 오래 되......어가고 있는 나도 좋다.

오래됨에서 나오는 운치가 있다.


*운치 : 고상하고 우아한 멋

photo by dud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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