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육감이 남달랐던 동생은 어쩐지 집에 늦게 오고 싶어서 학교에 남아 축구를 하고 오던 길이라고 했다. 역시 나와 같은 방법으로 제방으로 숨어 들어온 녀석은 싸움이 본 게임으로 치닫으면 불안감을 혼자 이기지 못하고 내방으로 베개를 들고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입을 삐죽이며 들어왔다. 사내자식이 어찌나 여린지. 일단 이불을 뒤집어쓰고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같은 데시벨로 묻어버릴 수 있는 노래를 낮게 불러 보기도 하고 귀를 막고 아아아... 를 낮게 외쳐보기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머리를 비우기 위해 하나 빼기라든지 쌀보리라든지 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한 놀이에 집중한다. 이때 우리가 둘이 함께 빠지게 되는 딜레마는 외부의 소음을 완벽 차단할 것이냐 소음을 감지해가며 놀 것이냐의 문제였다. 맘 편하기로 치면 완벽한 소음의 차단이지만 욱하는 성격의 소유자들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인 외부의 전장은 언제 무슨 일이 발발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여차하면 튀어 나가서 울며 매달려 둘을 떼어 놓아야 할 긴박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겠기에... 일단 밖에서 어떤 것이 깨지는 경미한 소리가 나면 손을 잡았다. 이미 그전에 여러 상황들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들이 진행되어 오던 차였기에 우리가 손을 맞잡을 즈음에는 각자의 손이 땀으로 찐덕한 상태였다. 이쯤이면 찝찝함 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외부에서 더 큰 무엇이 와장창 무너지는 소리가 나면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와락 껴안고 오돌오돌 떨었다. 한참을 그렇게 떨다가 떨어지면 어쨌든 마음이 좀 진정을 찾았다. 스킨십의 힘은 쫌 대단하다.
우리 엄마 아빠의 부부싸움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언어폭력은 난무하나 서로의 몸에 폭력을 가하지는 않는다는 거였다. 대신 주로 물건을 부수는데 깨지는 혹은 깨지지 않는 무엇을 상대에 빗나가 맞을 만큼의 틈을 주고 던진다던지 상대가 아끼는 걸 부수는 수준 정도였다. 물론 이것도 어린아이들에게는 대단한 공포를 안기지만 TV에서 본 혹은 이웃에서 목격한 폭력을 실제로 당한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물론 우리 엄마 아빠도 서로를 끌고 당기는 과정에서 런닝이 찢어진다든지 서로를 저지하기 위해 잡은 손목 등에 멍이 든다든지 하는 흔적은 남았다.
잠에 빠져 들어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심정과 자고 일어났을 때 어떤 사단이 나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의 수면은 이도 저도 아닌 가수면 상태가 된다. 어느새 전사들도 잠이 들었는지 고요한 아침이 오고 있었다.
저학년 초딩들에게 엄마 아빠는 세상의 전부다. 우주와도 같다. 우주 둘이 충돌하면 적어도 그들의 세상은 박살이 난다. 그 암울함이란... 그 참담함이란. 그 둘만으로 채워진 상대적으로 좁은 우주를 가졌던 우리들은 각자의 깨진 우주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거의 매일을 이런 심정으로 학교에 가면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없었다. 이제와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