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 <쇼스타코비치, 슈트라우스, 비버>
유튜브에서 볼 때마다 충격을 받은 음악단체가 있다. 바로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이다. 이들은 대체로 악보 없이 무대에 선다. 또는 악보를 앞에 두더라도 거의 보지 않는다. 곡을 완벽하게 외운 상태에서 서로 눈빛과 몸짓만으로 호흡을 주고받는다. 생각해 보면 어차피 악보는 작곡가와 연주자가 소통하기 위한 것이지, 연주자와 관객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방해물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연주할 때마다 진작 작곡가와의 소통을 끝낸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이런 퍼포먼스는 무대 위에서는 온전하게 관객과 소통하겠다는 자세라고 볼 수도 있다.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흐르고, 무대 전체가 하나의 퍼포먼스가 된다.
음반 재킷에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분이 보인다. 엄청난 에너지로 모두를 이끄는 바이올리니스트, 테리에 토네센(Terje Tønnesen)이다.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의 창단 멤버이자 오랜 리더이다. 그는 악장이라는 역할을 넘어, 오케스트라의 성격과 스타일을 결정짓는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소리로, 동작으로 음악을 먼저 보여준다. 그를 보고 있으면 어떤 음악인지가 들린다. 만약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 직접 가게 된다면 토네센의 리딩만 하염없이 바라볼 것 같다.
이 음반은 2025년에 발매된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의 결과물이다. 이들의 곡 해석 능력에 대한 신뢰 덕분에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작품들도 끝까지 몰입해 들을 수 있었다. 수록곡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메타모르포젠>, 하인리히 비버의 <바탈리아 10>,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실내 교향곡으로, 모두 전쟁과 깊은 관련을 지닌 작품들이다. 연주는 역시 대단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나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남긴 위대한 예술이라는 사실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오케스트라의 연주자들은 작품 속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면서도, 그 감정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에서 이런 울림이 분명히 전해진다. 이제 곡들을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메타모르포젠은 무너져 가는 세상을 향한 한 음악가의 독백이다. 23개의 현악 독주가 얽히며 만들어내는 음향은 작은 속삭임처럼 시작해서 강력하고 어두운 물결처럼 퍼진다. 전쟁과 폭격으로 주요 극장이 무너지고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는 광경 속에서 슈트라우스가 느낀 절망이 그대로 담겨 있다. 느릿한 템포 속에서 절규하는 듯한 소리들이 음악 안에 층층이 쌓여있다. 곡의 끝에서 스며 나오는 베토벤 영웅 교향곡의 장송행진곡은 우연이 아니다. 음악의 모든 요소가 힘을 모아, 한 시대가 품었던 이상과 문화가 되돌릴 수 없이 껴져 버렸음을 알린다. 노년의 슈트라우스는 어떻게 뼈아픈 시대를 음악으로 기억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노르웨이 챔버 오케스트라는 이 작품의 메시지를 정확히 꿰뚫는 연주를 들려준다.
하인리히 이그나츠 프란츠 비버(Heinrich Ignaz Franz Biber, 1644–1704)는 오스트리아-보헤미아 지역의 바로크 시대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다. 특히 바이올린 소나타와 종교음악에서 새로운 기법들을 남겼고, 지금은 바탈리아와 신비 소나타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다. 비버의 바탈리아는 슈트라우스 곡에서 이어진 무거운 장송의 기운을 다른 방향으로 비틀어낸다. 시작부터 병사들의 발걸음과 전장의 흥분을 연상시키는 강한 리듬이 몰아치고, 이내 악기들은 서로 다른 곡을 제멋대로 연주한다. 술 취한 병사들의 노래를 풍자하는 장면이다. 활을 나무로 두드려 북소리를 흉내 내거나, 현을 거칠게 긁어 전쟁터의 소음을 묘사하는 아이디어는 지금 들어도 아주 신선하게 들린다. 게다가 사람들의 거친 목소리나 현장 소음까지도 이 음반에서는 들을 수 있다. 웃기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한 이 곡에서, 의외로 마지막에 남는 것은 묘한 허무다. 소란스러움은 사그라들고, 전장은 정적에 잠긴다. 유머와 실험 속에서 결국 전쟁의 공허와 사람들의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쇼스타코비치의 실내 교향곡에는 원곡이 존재한다. 현악 4중주 8번이다. 그가 드레스덴의 잿더미를 목격한 뒤 단 사흘 만에 완성한 작품으로, “파시즘과 전쟁의 희생자들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곡은 작곡가 자신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는 네 음 DSCH(레–미♭–도–시), 곧 자신의 이름을 상징하는 동기를 끊임없이 새겨 넣으며, 음악을 통해 고통을 토해낸다. 폭력적인 리듬과 울부짖는 선율, 장송 같은 흐름은 처음엔 도시의 파괴를 직접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곡을 따라가다 보면, 쇼스타코비치가 평생 겪었던 정치적 압박과 예술가로서의 절망, 인간으로서의 불안과 두려움이 함께 쏟아져 나온다. 실내 교향곡 편곡에서는 이러한 감정과 소리 질감이 현악 4중주보다 훨씬 두텁게 다가온다. 현악 연주자들이 만들어내는 표현의 깊이는 끝을 알 수 없으며, 그 소리 속에서 연주자들의 표정까지 그려지는 듯하다.
이렇게 세 작품을 차례로 듣는 경험은 정말 특별하다. 전쟁이라는 공통의 그림자를 세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문명의 몰락을 애도하는 슈트라우스, 혼돈을 풍자하고 해부하는 비버, 파괴의 현장을 스스로 증언하는 쇼스타코비치. 전쟁이 인간의 삶과 예술을 어떻게 흔들어왔는지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공교롭게도 슈트라우스와 쇼스타코비치는 독일과 소련의 작곡가였다. 이 작품들을 남길 당시 다시 이미 벌어진 일이었던, 독일-소련전쟁이라는 참극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독일의 원로 작곡가였던 슈트라우스와, 소련을 대표한 쇼스타코비치가 서로 다른 진영에서 전쟁을 바라보며 남긴 음악인 것이다. 다른 시대, 다른 양식을 가진 작품들이지만, 전쟁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점은 세 작품이 닮아있다.
Essential Track | 10번 트랙 (Chamber Symphony in C Minor, Op. 110a: II. Allegro molto)
쇼스타코비치 실내교향곡 2악장은 현악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곡이다. 숨 쉴 틈조차 없다. 작곡가의 이름을 상징하는 DSCH(레-미♭-도-시) 모티프가 집요하게 반복되며 날카롭고 불안한 긴장을 만든다. 음악은 전쟁의 광기와 체제의 폭력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면서, 동시에 “나는 이 한가운데에 서 있다”라는 쇼스타코비치의 절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래 영상의 4분 36초 지점에서 악장 토네센은 네 개의 예비박을 강렬하게 제시한 뒤, 단원들과 함께 폭풍 속으로 뛰어들 듯 2악장을 시작한다. 이 악장은 반드시 실제 연주 영상을 통해 감상하기를 권한다.
https://youtu.be/KFb81Ug_I70?si=W2I9hue3htL42AP1
글 안일구, 사진 김신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