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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희 Nov 07. 2022

 돌아가신 어머니께 미역국을 드린다

  어머니께 드릴 미역국을 끓인다. 소고기와 대합조개를 놓고 고민하다 소고기를 넣고  끓인다.


 어릴 적 먹었던 어머니의 미역국은 조개류나 가자미가 들어있었다. 해산물을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입맛에 맞춘 것 같다.

가자미는 제철이 아니라 애초에 생각지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고기 미역국을 선호하니 나도 따라 하기로 한다.

아니 사실은

어머니가

어떤 미역국을 좋아하셨는지 조차

기억에 없다.  

    




  젊었을 적 시어머니와 11년을 함께 살면서 해마다 어머님의 생신 미역국을 끓였다.  그때만 해도 음식 솜씨가 형편없었던 터라 미역국 맛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 후 고기와 미역을 볶을 때 미리 어느 정도 간을 해야 하는 것과 물을 2~3번에 나누어 부어야 제맛이 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남편은 조개로 맛을 낸 미역국을 좋아하지만 아들은 조개류를 입에 대지도 못한다.

그렇게 가족의 식성까지 고려하여 미역국을 끓여댔건만 정작 나는 11년 동안 한 번도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먹어보지 못했다. 어른과 함께 살면서 내 손으로 생일 미역국을 끓인다는 게 멋쩍고, 

서글퍼게도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는 50대 초반 고단한 인생의 벽을 넘으시면서 병을 얻으셨다. 그래서 자식들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셨다. 어머니와 같이 사는 즈음 30대였던 나는 그 사연을 모르고 못내 서운해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죄송할 따름이다.


 남편은 생일 아침 미역국을 먹지 못한 나를 위해 저녁에 종종 횟집으로 데려갔다. 

횟집에는 애피타이저로 미역국이 나온다.

그 당시 남편으로선 아마 나름의 최선이 아니었을까.   

  


 

  생일에 미역국을 꼭 먹어야 한다는 생각은 친정어머니 때문이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다닐 적까지 함께 사는 동안 한 번도 내 생일을 잊으신 적이 없다.

생일 아침상에는 늘 팥밥과 미역국, 생선구이와 색다른 반찬 두어 가지가

상위에 놓여 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객지 생활을 한 후부터는 생일에 맞춰 집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20대가 된 나는 미역국이 생일 당사자인 나보다 산고를 이겨낸 어머니의 노고를 생각하게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생일이 되면 어머니께 전화로나마 감사 인사를 드렸다.

어머니는 늘 “미역국은 먹었냐?”라고 하셨고 통화 끝엔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지금 50대의 나는 20대의 아들에게서 전화를 받고 ‘고맙다’는 말을 한다.

어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친정어머니는 평생 자식들의 생일을 잊으신 적이 없다. 8남매에 그 배우자의 생일까지 기억하셨다. 

나와 남편의 생일은 가을이다. 결혼한 지 몇 해 못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얼마 후 어머니도 병석에 누우셨다.

평소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 나는 방학이면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돌아오는 날이면 어머니는 음력 날짜를 물어보셨다.

당뇨 합병증으로 앞이 거의 보이지 않으셨던 어머니는 “ 오늘이 음력 며칠이고?

 니캉 조서방 생일에 소고기 사서 미역국 끓여 먹어라.” 시며 

속주머니를 더듬어 내 손에 꼬깃꼬깃한 만원 지폐 몇 장을 쥐어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의 사랑이 묻은 돈으로

소고기를 사서 남편의 생일 미역국을 끓였다.      

     

 시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고 난 다음 해부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생일 미역국을 직접 끓였다. 

하지만 몇 년을 계속하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과 아들을 위해서 매번 생일 미역국을 끓이는데

 ‘난 뭐지’ 싶은 생각에 퉁퉁 부은 목소리로

“내년부턴 당신이 끓여 줘요.”라고

부탁 아닌 협박을 했다.

그때만 해도 요리책 외에 유튜브의 요리 채널도 없었던 터라 거의 내가 하다시피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국의 간을 무엇으로 맞추는지도 모르는 남편에게 미역을 불리고 고기와 미역을 참기름에 볶아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옆구리 찔러 절 받기로 시작하긴 했지만 이제 남편과 아들이 끓여 주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게 됐다.

물론 맛도 제법이다.    

 



 나이 든다고 철이 드는 건 아닌가 보다. 잔정은 있는 편이지만 정작 신경 쓰고 챙겼어야 하는 일들은 놓친 게 많다.

8남매의 막내라서 그런지 부모님은 물론 언니 오빠들에게도 받는 것에 익숙하고 당연하다 여겼었다.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야 넘치는 사랑과 배려를 깨닫는다. 보내 버린 시간만큼이나 후회가 쌓인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갚아야 할 마음의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부끄러움이 두 볼로 흘러내린다.

내 생일에 미역국 한 그릇 얻어먹겠다고 남편을 들볶을 줄만 알았지 정작 부모님 생신에 내 손으로 생신상은커녕 미역국 한 그릇조차 끓여 드린 적이 없었다.


왜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드는지 가슴이 아려온다.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자. 아버지의 기일이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생신날 저녁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나신 3년 후 곁으로 가셨다.  

3년 동안 모시고 살던 오빠네가

아침에 어머니의 생신상을,

저녁엔 아버지의 제사상을 차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몇 년 뒤부터 나는 자연스레 오늘을 아버지의 기일로만 여겨왔다.


가끔 추억의 서랍 속에서만 꺼내던

어머니의 생신.

살아 계신다면 올해로 100번째이다.


나는 사진 속의 어머니께 드릴 미역국을 끓인다.

돌아가신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철없는 막내딸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오르는 속울음을 삼키며, 당신은 드실 수도 없는 미역국을 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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