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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는 않는데 죽고 싶을 수도

by 다이아

2024년 10월 16일(수) [2]


E 대학병원의 아침은 이르게 시작된다.


오전 5시, 혈압과 체온을 잰다.

오전 5시 30분, 혈당을 잰다. 따끔하다!

오전 7시 20분, 식사가 나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아침을 때우던 나에게 이른 아침식사는 생각보다 곤혹이었다.


게다가 병원밥은 어찌 이리도 맛이 없는지!

여의도에서 근무하며 매 끼니 도파민 넘치는 가속노화 식사를 해오던 나였다.

밍밍한 병원밥은 큰 시련이었다.


충실한 보호자인 남편은 나의 식사태도에 은근한 잔소리를 시전 한다.


"편식하지 말고 고기 먹어야지!"


임신 6주 차.

입덧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기의 냄새와 맛이 너무 역했다.


남편이 깨작대는 나를 얄밉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미안... 그래도 못 먹겠어.


식사를 마치고 남편과 시시덕거리다 보니

J 교수님이 회진을 오셨다.


"MRI 보고 왔어요.

다행히 길랑바레 증후군은 아닙니다.


영상의학과 교수님의 MRI 판독을 받긴 할 텐데

척수염까지는 진단 내릴 수 있겠네요.

그럼 이젠 이 척수염의 원인 질환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한 검사를 진행할게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길랑바레 증후군이 너무 무서웠다.

호흡기가 굳어 죽을 수도 있는 병 아니었는가.

여러분! 나 길랑바레 증후군 아니래요!


척수염! 고작 염증 아닌가.

비염, 임파선염, 결막염, 중이염, 위염, 장염 등

내가 이겨낸 수많은 염증이 머리에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 신경과 병동에 자리가 났어요.

일단 전동 하셔서 뇌척수액 검사 진행할게요.


요추에서 주사로 뇌척수액을 뽑는 건데...

이건 이따 자세히 설명드릴게요."


언뜻 무서운 얘기가 지나간 것 같은데...


이후 교수님은 내 다리의 상태를 체크했다.

내 나이가 만 33세로 젊고

현재 근력상태가 나쁘지 않으며

상반신까지 증상이 퍼진 건 아니라

금방 나아질 거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

저림 통증이 하반신 전체에 번졌다.

온도를 잘 느끼지 못한다.

누가 다리를 만지거나 꼬집어도 모른다.

다리가 움직이긴 하나 위치감각이 없다.
어느새 걷기는커녕 일어서지도 못한다.


휠체어 의존도 100%, 남편 의존도 100%

[총평] 이동력 빵점


회진이 끝나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어 올린다.

척수염에 대해 탐구할 시간이다.


척수는 몸의 운동 신호는 물론 각종 반사 작용과 내장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척수에 염증이 생기면 운동 기능과 함께 각종 신경계에 문제가 생긴다.

① 사지 운동 능력 저하, 감각 이상, 마비
② 허리, 팔, 다리 등으로 연결되는 통증
③ 장과 방광 기능 장애, 괄약근 기능 이상
④ 미열
⑤ 과도한 근육 긴장

대부분 발생 초기에는 증상의 변화가 없다.
약 4~8주 정도 지나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한다.
첫 3~6개월 정도 빠르게 회복되므로 이 기간 동안 재활치료로 기능이 최대한 회복되도록 한다.
이후 2년 정도에 걸쳐 서서히 회복되는 경과를 보이며 2년이 지나면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

환자의 1/3은 거의 후유증 없이 회복된다.
회복되지 못하고 심한 장애가 남는 경우도 전체의 1/3 정도에서 발생한다.

일회성으로 발생하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전신적 질환이 동반된 경우 재발하는 경우가 흔하다.

척수염은 자체가 생명을 단축시키지는 않는다.
평생 어느 정도 장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이에 따르는 우울증이 더 큰 문제이며 척수염 환자에서 가장 중요한 사망원인은 바로 '자살'이다.


내겐 ③을 제외한 모든 증상이 있다.


게다가...

회복기간은 왜 이렇게 길어?

재발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환자의 2/3은 장애를 가진다고?

혹시 이 상태로 평생 살 수도 있나?


죽을병이 아닌 건 다행이야.

근데 장애로 인해 죽고 싶어질 수는 있대.

하, 고작 염증이 아니잖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는 짜증이 내 몸 전체를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점심 먹고 전동이 있을 거라 한다.

남편이 부지런하게 이삿짐을 싼다.


헉? 갑자기 급격한 변의가 느껴진다.


다급하게 남편을 부른다.

남편이 날 안아서 휠체어로 옮긴다.

남편이 빠르게 화장실로 휠체어를 끌고 간다.

남편이 날 안아서 변기로 옮기며 하의를 벗긴다.

묵직한 소리가 동시에 이어진다.


"자... 자기는 잠깐 나가봐!"


늦었지만 남편을 일단 내보낸다.

하던 일을 마무리한다.

링거가 꽂힌 팔로 허둥지둥 뒤처리를 한다.

우당탕쿵탕


남편이 위험하다고 뭐 하냐며 화장실로 들어온다.

조금 치웠지만 아직 처참하다.


남편이 날 일단 휠체어로 옮긴다.

남편이 병실 침상으로 데려간다.

남편은 말없이 다시 화장실로 들어간다.

한참 물소리가 난다.


미안하다.

치욕스럽다.

어디에라도 숨고 싶다.

이래서 죽고 싶어질 수도 있다고 하는 거구나.


그제야 나는 내게 ③번 증상도 있음을 인정했다.

③ 장과 방광 기능 장애, 괄약근 기능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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