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Red or Blue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화장실 칸막이 아래로 나타난 창백한 손이 두 개의 휴지 롤을 내밀었다. 왼 손엔 빨간색, 오른 손엔 파란색. 최서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을 위해 연습했던 대로 차분하게 말했다.
"죄송한데요, 이거 아무도 안놀라죠? 제 사무실로 오시면 영업 상담을 해드려요. 지금은 개인 시간이니 물러가주세요."
서연이 자신의 명함을 문 바깥으로 밀어 넣었다. 귀신 손이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작은 한숨 소리가 들리더니 휴지 롤을 쥔 손이 사라졌다. 명함과 함께.
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화장실에서 귀신을 만나는 건 여전히 무서웠다. 심령술사로 5년째 일하고 있지만, 이런 돌발 상황은 언제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다.
서연의 사무실은 강남 오피스텔 12층에 있었다. '서연 심령상담소'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 중이었다. 귀신들 사이에서도 꽤 알려진 곳이었다.
"어떤 모습일지 정말 궁금했어요. 보통 뭐라고 불리세요? 혹시 이름이 기억 나세요?"
창백한 안색을 가진 귀신이 서연 앞에 앉았다. 그녀는 경성 시대 스타일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구식 의상이 오히려 더 트렌디해 보인다고 서연은 생각했다.
"제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요. 100년 동안 화장실 귀신으로 일했어요.“
서연은 노트북을 열고 상담 기록을 시작했다.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귀신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요즘 장사가 안 돼요. 옛날에는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하면 사람들이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했는데... 요즘 사람들은 스마트폰만 보다가 '아, 네' 하고 대충 대답해버려요. 어떤 사람은 인스타에 '오늘 휴지귀신 만남 ㅋㅋ #귀신조우 #화장실괴담' 이렇게 올리더라고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도시괴담 업계도 불황이었다. SNS와 공포영화의 범람으로 공포의 문턱이 너무 높아진 탓이었다. 도시괴담 귀신들은 관종비즈니스였다. 관심받지 않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 공포가 극대화 될수록 관심은 높아지는데, 이제 이런 옛날 귀신들은 멸종 위기에 처해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잔혹한 공포영화가 너무 많아진데다, 유치원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도시괴담을 너무 빨리 학습한 탓이다. 4K 모니터로 수천만컬러의 색상을 즐기는 시대에서 빨간 휴지 파란 휴지의 원색 공포는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트렌드에 맞게 변화가 필요해 보이네요." 서연이 말했다. "지금 방식은 1970~80년대 유행했던 거고요. 2025년에는 색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귀신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사실 저는 화장실 귀신으로 브랜딩이 되어 있어서, 다른 장소로 옮기기도 좀 그렇고...“
“그 전에 왜 화장실 귀신으로 브랜딩을 하셨을까요.”
“그, 그건, 글쎄요. 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올랐어요.”
“조금씩 기억을 떠올려 봐요. 자 눈을 감아요. 제가 셋을 세면 죽기 전 과거로 가는거에요”
서연이 귀신의 손을 잡았다.
“하나, 둘, 셋!”
여자아이가 1965년의 한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 있었다. 김미영이라는 명찰을 달았다. 수업중 누군가 미영의 뒤통수에 지우개를 던졌다. 뒤를 돌아보자 여자 학우가 입을 크게 벌려 소리 없이 욕을 했다.
‘야이 미친년아’
수업이 끝나자 아이들은 미영을 화장실로 끌고 가 머리채를 잡았다. 한명은 미영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한명은 미영의 따귀를 때렸다.
‘드러운 년, 니 어미 술집 다니는거 다 알아, 어디서 드러운게 우리랑 같이 학교를 다녀 이 썅년이’
학우들의 린치는 계속되었다. 이를 버티지 못한 미영은 수업이 끝나자 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숨었다. 학우들이 미영이 숨은 칸을 찾아내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미영은 그 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신발끈을 목에 매고 화장실 옷걸이에 걸었다. 분노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다.
“제발, 그만! 그만좀 해!”
미영의 눈에서 보라색 눈물이 줄줄 흘러 연기처럼 증발했다.
“이제 다시 셋을 세면 눈을 뜨고, 꿈에서 깨어날 거에요. 하나, 둘, 셋!”
미영의 온 몸에서 보라색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상담소의 대기가 습해지고 있었다.
‘위험해!’
미영은 재빨리 향을 피워 미영을 진정시켰다. 약한 귀신은 심리가 불안해지면 증발하는 경향이 있다. 서연은 수습 상담사 시절 실수로 귀신 하나를 증발시킨 적이 있었다.
“보통 귀신들은 한 곳에 가장 많이 머물러요. 인간 시절 기억에 각인된 공간에요. 미영씨는 안타깝게도, 화장실이 기억에 남는 가장 강렬한 공간이 됐던 거에요.”
향불로 인해 미영의 몸에서 수증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영의 눈에선 보라색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제 다른 방식으로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서연은 미영의 귀신 사업 컨설팅을 진행했다. 먼저 그들은 미영의 강점을 분석했다.
"미영씨는 사람들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화장실은 사람들이 폰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기는 몇 안 되는 장소죠. 이건 정말 큰 경쟁력이에요."
"그럼 휴지로 겁을 줄 수 있어요?"
"휴지 선택으로 공포를 주는 것보다, 사람들의 내면 불안을 건드리는 접근은 어떨까요? 예를 들면, 미영씨가 화장실 칸막이 아래로 쪽지를 밀어넣는 거예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고민이나 비밀을 적은..."
미영의 눈이 빛났다. "와, 그거 진짜 무서울 것 같아요!"
"맞아요. 현대인들은 신체적 위협보다 심리적, 사회적 위협에 더 취약해요. 특히 관계가 허물어지는게 가장 큰 공포에요. 색색깔의 휴지보다 자기 비밀이 들러나는게 더 두려울 거에요. 특히 누군가를 괴롭혀 온 사람이라면? 그걸 알 수 없는 존재가 SNS에 올리겠다고 한다면?“
3개월 후. 한 중학교 여학생 화장실 칸에 미영은 쪽지를 밀어넣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어때, 사람 괴롭히니까 좋아? 네 만행을 남친에게 알리겠다. 인스타에도 공개되면 재밌겠네?’
여학생이 급히 화장실 문을 열었지만 아무도 발견할 수 없었다. 미영은 완벽하게 새 비즈니스에 적응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 풍경이 펼쳐졌다. 빌딩숲 사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처럼, 귀신들도 시대에 맞춰 변화하고 있었다. 서연은 이런 생각을 하며 미소지었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결국은 적응해야 살아남는 법이니까.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빨간 마스크를 쓴 여자가 다가와 서연에게 말을 걸었다.
“얘, 나 어떠니? 내 얼굴 예쁘지?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