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단우 May 08. 2020

오늘이 마지막 산책이 되지 않기를 (1)

아이의 걸음에서 노령견임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올해보다 디디가 더 산책하고 싶었던 날이 있었을까? 코로나 여파로 디디는 산책을 나갈 수가 없었다. 일단 개에게 감염된다는 위험이 없었다가, 갑자기 코로나 반응이 나온 보도를 듣고 더 이상의 산책이 금지당했다. 정말 불가피하게 동물병원을 가야 한다든지 그런 날이 있을 때에도 디디를 꽁꽁 싸매고 나서야 했다. 어쨌든 간에 노령견이 지독한 질병에 걸린다는 건, 사망이라는 위험지수가 크게 높아지는 셈이니까. 디디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러하거니와 개를 바라보는 시선도 옛날 같지 않았다. 누가 봐도 '극혐'하는 눈초리와 금방이라도 쌍욕이 나올 것처럼 씰룩대는 입술. 이런 것들을 감당하고서 산책을 나서긴 쉽지 않았다.



  우리는 옥상 위에 올라가 간식 찾기 놀이를 하며 실내 산책으로 대체했다. 초록색 리놀륨 바닥 위로 트릿 간식 몇 알을 여기저기 뿌려놓고 동선을 만들어서 걸어 다니면서 간식을 먹게끔 했다. 날마다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졌는지, 숨겨놓은지 5분도 되지 않아 10알의 트릿 간식을 모조리 찾아내었다. 




  "너, 너무 빨리 찾는 거 아냐?"




  '어쭈'하는 마음이 들었다. 운동의 목적으로서의 실내 산책보다 도리어 이 녀석이 찾지 못하게 약 올리기 위한 장난기가 불쑥 올라왔다. 머리를 잔뜩 굴리며 화분 틈 사이로 숨겨놓거나, 디디가 간식을 먹고 있는 틈을 타 둔부 쪽으로 숨겨놓아 빙글빙글 돌게 만들기도 했다.



  한 달 동안 실내 산책을 진행했다. 아무리 늙은 개라지만 걷고 싶어 하는 욕망은 젊은 개 못지않기에, 온통 좀이 쑤시는 것처럼 보였다. 옥상 위를 유유히 걷고 간식을 찾아 냠냠 먹으면서도, 때때로 빈 허공을 향해 코를 킁킁거렸다. 세상의 냄새를 맡고 싶은 것이다. 안전펜스 너머 보이는 길가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보였다. 디디는 뒷다리를 굽히고 사람들 방향으로 킁킁거렸다. 이제 낯선 사람의 향기는 위협적이기보다 그리움의 대상이 된 것일까?






  날이 포근해지면서 신규 확진자와 사망자의 수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벚꽃이 흩날리며 봄이 왔다고 화려하게 선언했다. 산책 펫시팅 의뢰도 조금씩 생겨났다. 일주일에 1번 있던 산책 요청이 2번, 3번으로 점차 늘어났다. 디디도 본격적으로 실외 산책을 나설 때가 되었다.



  오후 4시. 햇볕이 따뜻하게 드리우고 있었다. 디디에게 하네스를 입혔다. 오랜만의 산책에 가슴이 떨리고 흥분되었다. 디디는 하네스 입는 것을 퍽 어색하게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하네스를 입고 자리에 앉거나 서서 현관문을 응시했을 텐데,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를 올려다보면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눈빛을 보냈다.




  "나가자, 산책."




  디디를 안아 들고 건물 계단을 하나둘씩 내려왔다. 오늘의 목표는 함께 근처 공원을 두 어 바퀴 걷는 거다. 발걸음에 출렁이는 등허리를 보면서 결연한 다짐을 했다. 마치 그동안 밀린 방학숙제를 해내는 기분이 들었다.



  원래 주된 산책로는 근린공원 2군데, 애견공원 1군데, 어린이공원 2군데, 근방에 새로 생긴 반려동물 카페 1군데, 이렇게 총 다섯 장소이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길은 어린이공원인데, 입구에는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중간쯤 지나서는 장송들이 우뚝 솟아있어 서로 다른 풍경을 마주치는 것이 기분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공원 초입의 개나리들과 인사를 하고 5분쯤 더 걸어가면 장송들 몇이 우뚝 솟아있다. 장송들을 보노라면 도심 속에서 숲을 체험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공원 한가운데에 울퉁불퉁 솟아있는데 생각보다 비쩍 말라서 볼품없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삼림욕을 할 수 있다는 상쾌함을 얻을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든다.



  산책로를 상상하다 보니 벌써 1층 건물 입구에 다다랐다. 안고 있던 디디를 내려놓고 두 손에 나란히 리드 줄을 쥐었다. 자, 이제 정말 가는 거다!






  이렇게 야심 차게 산책을 나섰는데 이게 웬걸. 디디는 휘적휘적 걷지도 못하고 굼벵이처럼 한 발 한 발을 느리게 디뎠다. 무릎 아픈 어르신들이 종종걸음을 걸으시듯이 그렇게 말이다. 아니지, 백발이 성성하고 허리가 굽으신 어르신들의 꼬부랑 걸음. 딱 그런 느낌으로 걷고 있었다.




  "디디야, 좀 더 빨리 걸으면 안 될까?"




  디디가 느리게 걷는 줄 모르고 평행해서 걷다가 어느새, 내가 앞질러버렸다. 순간적으로 뒤쳐진 리드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디디는 당황해서 걷기를 멈추고 리드 줄을 자기 몸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힘마저도 약하게 느껴졌다. 리드 줄의 약한 조임을 느끼고 멈춰 섰다. 줄을 돌돌 말면서 디디에게 다가가 앉았다.




  "힘들어? 아니면 어디가 아파?"




  처음에는 슬개골에 문제가 있어서 느리게 걷는 줄 알았다. 과거에도 몇 번 다리가 빠졌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뒷다리를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흔들었는데, 관절의 꺾임이나 뭐가 빠진 듯한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귀찮다는 듯 얼룩말처럼 뒷발길질을 하는 바람에 그 녀석의 발톱이 내 안경을 차 버렸다. 욱하고 짜증이 올라왔지만 그런 감정보다 디디가 중요했기에, 화를 내지 않고 꾹꾹 참았다. 이번에는 발바닥을 살폈다. 때로는 껌이나 이물질이 발바닥 쿠션이나 털 사이로 달라붙어 깽깽이를 짚은 날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발바닥은 아주 깨끗했다. 뭐, 이제 막 몇 발을 걸었을 뿐이니 이물감이 느껴질 리 만무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디디를 다시 걷게 했다. 정면으로 리드 줄을 살살 풀고 자리에 쪼그려 앉아 디디가 나에게 다가오게끔 했다. 디디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평소에 보지 못한 이상한 행동에 긴장감을 느꼈는지 혀로 코를 날름 핥았다. 자리에 일어나서 다시금 리드 줄을 붙잡고 아까보다 더 느린 걸음을 걸어 보았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디디가 보행을 맞추며 걸어갔다. 하나 둘셋넷...



  아, 디디의 걸음마저도 늙었구나! 장송 구경은커녕 공원 근처에도 갈 수 없게 생겼다. 한참 걸으면서 재어보니 나의 한 발자국은 디디의 다섯 발자국이 되었다. 실내 산책으로 인해 운동량이 부족해지면서 근육과 관절의 노화가 가속화된 것이다. 아이의 걸음은 시간의 흐름을 타고, 이미 많이 무뎌져 있었다. 

이전 18화 이겨낼 수 없는 펫로스 증후군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