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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ul과 친구들 Sep 25. 2024

현재, 서울, Daniel의 고민

뉴욕의 폴에게, 50을 코앞에 둔 K-직장인의 최후의 보루에 대하여

Hi Paul,


보내 주신 답장은 잘 받아 보았어요.

그러고 보니 MBTI에서 겹치는 것이 'N' 하나뿐일 정도로 우리는 많이 다르네요. (저는 INFP)

그런데도 이렇게 오래 지내는 걸 보면 사람이 꼭 닮아야만 좋은 친구가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어쩌면 오히려 서로 다른 모습에서 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일지도.


Anyway, 지난 폴의 편지에서 가장 와 닿았던 이야기는 이거였어요.



뉴욕으로 떠난 결심이 대범해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게도 두려움이 있었고, 
그런 선택을 하게 만든 상황과 어려움이 있었다고 봐.
하지만 떠났기에 뉴욕에서의 지난 10년이 있었고,
그 시간을 보내면서 생존을 위한 창의력이 생긴 거지.
그렇게 10년을 지나 보니 앞으로 20년의 길이 보이긴 하더라.



지난해 폴이 '너도 이제 떠날 준비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라고 했을 때 제가 보았던 것이 그거였거든요.


폴이 본 앞으로의 20년의 길.


그래서 제 마음도 움직였던 것 같아요.

폴을 알고 지낸 지 15년이 지났고, 폴이 뉴욕으로 떠난 지도 10년이 흘렀지만 그 사이 크게 움직이지 않았던 제 마음이 비로소 움직인 이유.


저 길이라면 따라가 볼 수 있겠다.




몇 년 전에 제 위의 임원이 재계약이 안 되면서 갑자기 회사를 떠나시게 됐어요.

엉겁결에 조직의 책임자가 되어서 임원은 아니지만 임원 직책을 수행하게 된 거죠.

그렇게 몇 년을 보내는 동안 코로나 팬데믹도 겪고 이런저런 부침들도 견뎌내면서 그럭저럭 조직이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지난해부터 찾아 온 극심한 프로젝트 기근이 올해까지 계속되면서, 팬데믹이 끝나면 업황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게 됐어요.

제가 맡은 조직도 지난해까지의 성장을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실적이 떨어졌고, 이 상태로는 내년 상황 역시 어려울 수 밖에 없어 보여요.


그렇다 보니 이래저래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 이직하거나 업계를 떠나는 친구들을 붙잡거나 회유할 명분도 방법도 없는데, 더 문제는 남아서 걱정하는 친구들에게 제시할 어떠한 분명한 비전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거에요.

아무리 이 업계가 어렵다, 어렵다 한 지가 10년이 넘었다 하지만, 이 곳에 발을 들여 놓은 이래 요즘처럼 힘든 시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솔직히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아요.




물론 업에 대한 비전이니 업계의 미래니 하는 것들을 떠나 그냥 직장 생활이라고 치면 몇 년 더 버틸 방법이 없진 않을 거에요.

임원이 아닌 직원이라는 게 이럴 땐 좋은 거죠.

실적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하고 남은 조직도 추스려야 하는 과제들이 있지만, 어쨌든 버티자고 마음 먹으면 버틸 수 있는 것이 K-직장인이 가진 최후의 보루니까요.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버티다 보면 그 사이 아이는 자라 줄 테고, 어떻게든 대학까지만 보내고 나면 그 때는 여길 떠나든 다른 길을 찾아 보든 한결 부담이 덜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게 1안.




1안의 장점은 '지금 여기서 버티기만 하면 된다'는 거지요.

스트레스는 좀 있겠지만 그 동안 쌓인 짬바로 마인드 콘트롤해가면서 그렇게 지내는 일은 (약간의 자존심만 내려 놓으면) 현재 시점에는 가장 편하고 쉬운 방법일 수도 있을 거에요.


단점은, 그 사이 또 몇 년의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 버린다는 거.

(시간을 보내려고 버티는 건데 이게 장점이자 단점이 되네요)


그러고 나면 50 중반.

2024년 통계 기준 한국 남자의 평균 수명에 따르면 31년을 더 살아야 하는 시기.

은퇴하기엔 이르고 같은 업종에서 이직하기엔 늦은 나이.


결국 많이들 그러듯 그 동안 쌓은 커리어와 전문성을 내려 놓고 단순직으로 재취업하거나(요즘은 이것도 경쟁률이 어마어마하다네요), 약간의 퇴직금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 소액 창업을 알아봐야 할 텐데(치킨집? 카페? 아니면 요즘 뜨는 요아정?), 어떤 것이든 한 살이라도 덜 먹었을 때 시작하는 게 유리한 거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어디서 어떻게 제2의 시작을 할 수 있을지 열심히 고민하고 1년이라도 빨리 떠나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는 게 2안.


물론 2안의 장점과 단점은 1안의 반대겠지요.

시간을, 아니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를 미래와 노후를 위해 투자할 수 있지만(장점),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막막한 변화와 도전에 대한 고민을 몇 년 뒤가 아닌 바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단점).




Simply, 현재 저의 고민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1안) 

아이도 아직 한창 크는 중이고 조직에서 당장 나가라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어쨌든 K-직장인의 최후의 보루를 잘 활용하면서 여기서 몇 년 더 버텨 보자.


2안)

앞으로 30년을 더 살지 40년을 더 살아야 할지 모르는데 어차피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한다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시작하는 게 좋으니 몇 년 안 남은 직장 생활에 미련 갖지 말고 박차고 나가자.


물론 폴은 40대 초반에 제2의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직장도 아니고 한국을 박차고) 뉴욕으로 떠났을 만큼 확고한 2안파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저의 사정과 고민을 잘 아실 테니 1안과 2안에 대한 의견과 조언을 균형 있게 들려 주시면 좋겠어요.


결론이 2안이어도 좋아요.

대신에 사춘기 자녀를 기르고 있는 K-아버지이자 가장으로서 납득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뒷받침되어야 소심하고 겁 많은 제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ㅎ



P.S.


인생은 정반합이라는데, 혹시 3안은 없으려나요?

1안과 2안의 장점만 합친(...)



Sincerely,

Dan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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