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날이다. 단전 밑 어딘가 싸하고 불편하다. 아침부터 금지된(암환자였던 나는 먹는 것이 금지되다시피 했다) 커피 믹스 한잔을 말아 마시고, 청소기를 돌렸다. 환기를 시켜야 그나마 이 꽉 막힌 듯한 머리가 좀 순환될 듯하여. 아이들은 신이 났다.
‘오늘 가고 원에 안 간다!’, ‘올해는 여기저기 가려면 바쁘겠다!’
엄마 속도 모르고 신이 난 아이에게 시선을 거두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방금 마신 것 같은데 커피 한잔이 더 시급하다. 실제로 집중력과 의지력은 먹는 것에 달려 있다는데, 오늘은 몇 잔 더 마시는 것이 당연하지 싶다.
고작 1년 아팠는데, 10년은 더 산 사람처럼 많은 것이 바뀌었다. 특히 사람에게 다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고, 대신 치레는 정말 불필요하다는 생각에 확신이 생겼다. 결국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 관계는 의미 없다는 것.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치레는 정말 의미 없는 짓이다. 그리고 당장 내일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서 함께해 준 이들에게 다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친척은 그럼 그 중간 어디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 걸까. 그들은 가족일까. 아니면 남일까.
인스타에서 할머니가 갑자기 손녀를 예쁘다며 안아주는 영상을 보았다. 나의 할머니 생각이 나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이것도 도파민 때문인가). 나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를 부모님처럼 따랐었는데, 나의 아이들 세대에서도 그런 것들이 가능할까. 그럼 나는 나의 시부모님께 우리 부모님이 우리 조부모님께 했던 것처럼 할 수 있을까. 이제 이런 자괴감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지만, 적어도 나는 옛날 사람(?)이다. 그런데 또 나는 요즘 사람(?)이라, 나의 부모님 말고 그 외에 어른들까지 챙기기 어려운 사람이다. 핑계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아프면서는 더욱 그랬다. 어떤 사람은 아프면 더 너그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옹졸해진다. 더 아끼고, 더 감춘다. 그동안 퍼주던 것들(사랑, 시간, 돈)을 내가 정말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쓰고 싶어 진다. 그래서 아프고 나서 많은 관계에서 어려움이 느껴졌다. 애정에도 총량의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지친 몸에 남은 적은 양의 애정은 몰아 쓸 수밖에 없다.
앞서 쓴 글처럼 지금 나의 상태는 매우 혼란스럽다. 다정하면서 옹졸하고, 커피를 마시면 안 되지만 중독자이고, 살은 빼야 하지만, 또 빼서도 안되고, 부모님은 공경하지만, 모시긴 싫다. 그 중간 어디를 해야 하는데, 나만 못 하는 것인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전에 다이어트한다면서 입에 쌀과자를 집어넣고 있는 나를 보고는 ‘언니는 참 아이러니 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점점 더 모순적인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우리 사회가 그런 걸까.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계속 이런 질문들과 이상한 믿음들이 생겨나는 것은 살아남기 위한 자기 방어일까 아니면 더 아프려고 뻘 짓을 하는 걸까.
답답해서 안 될 것 같아서 연재를 시작한다.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