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선거 이야기로 어수선할 때에 나는 권여선 작가님의 <각각의 계절>을 읽고 있었다. 첫 단편인 ‘사슴벌레식 문답’을 읽었을 때, 나는 ‘어휴, 이런 소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쓰질 못하고 죽지 않을까’ 싶었다. 지식이 쌓이고, 나이가 든다고 해서 쓸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금 나도 모르게 사슴벌레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대해서도. 단편 하나를 읽고 숨 고르는 시간이 참 길었다. 어릴 때 생각이 많이 낫다. 다르게 말하면 긴 세월을 흐른 미래의 내가 나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많이 일었다. 그리고 선거가 있던 어제, 비가 올 것 같았지만, 오지 않았고, 해가 떠서 뛰어놀려고 나갔는데, 재킷을 여며야 했을 때, 다시 각각의 계절을 집어 들었다. 감정이 널뛰는 것은 날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날씨 때문에 감정이 널뛰는 것은 감히 정상인가 라는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그리곤 ‘무구’를 읽었다. ‘하루만 먼저 이 글을 읽었으면 좋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결과가 달라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구한 사람들의 무구한 결정들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왔는지 우리는 알지 않은가.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나는 우리의 국민성이 ‘백의민족’이라는 말에 걸맞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때때로 순수하고, 자주 도덕적이며, 지혜롭고 싶기에 무구한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대체로 무구하지 않다고 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렇다고 생각한다. 의도가 나쁜 경우는 별로 없으며, 그렇다 할지라도 자신의 성장과 발전을 위하거나 혹은 무척이나 순수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 많은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구하기에 벌인 여러 일들을 보았을 때, 사회의 이면을 보지 않고, 공존을 추구하지 않고, 안주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모두가 알다시피,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긴 투표지를 받아 들었다. 투표용지 길이에 한번 당황하고, 어떻게 접어야 하나 생각할 때 또 한 번 당황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무지를 후회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했다. 나의 선택이 만든 혹은 앞으로 만들 일에 대해 생각했고, 사슴벌레식 문답처럼 어떻게든 그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로 결론짓지 않도록 3분 안에 내 모든 집중력을 쏟아 넣었다. 그렇다. 정말 진지했다. 솔직히 선거 후에 여러 번 후회했다. 나의 경솔함에, 알아보려 하지 않은 나의 어리석음에, 또 그 무구함으로 어느 누구도 잘못한 적 없지만, 이전의 참담했던 그 결과에. 그래서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또 이렇게나 모르는 채로 이 자리에 서다니. 소설책을 읽을 때가 아니었다는 후회는 할 때가 아니었고, 그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내가 소설 속에서 보았던 사회의 이면을 여기서 찾고, 찾아진 적 없으나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던 방향도 찾아야 했다. 모르는 채로 눈 감고 안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의 말이 수수께끼처럼 들릴 수도 있다. 나에게도 정치는 수수께끼 같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투표하러 가면서 소설을 읽는 것은 생각을 비우기 위함도 마음을 닦기 위함도 아니다. 내가 나무로써 볼 수 없었던 큰 숲이 그 작은 세상 안에서는 보였기 때문이다. 절대 찾을 수 없을 거 같았던 답도 소설을 읽는 동안은 잠시 알았던 것도 같다. 초록색 종이에 빨간 도장을 찍던 순간에 그 작은 세상이 큰 지혜가 되어 주었기에 그렇다. 누군가 다음 선거가 기다려진다고 SNS에 썼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알 것도 같다. 어떤 선택을 했던지 간에 확실한 것은 더는 눈 가리고 귀 막고 아웅 하는 식의 결정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그 하얀 종이들이 우리의 민족성을 말하고, 그 초록 종이들이 모여 숲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무구하지만, 무지하지 않도록, 나는 다음 선거를 위해서 또 소설책을 집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