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슬픈 손가락이 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예쁘지는 않아도 늘 불편함이 없던 손가락이었다. 때로는 손가락과 마음 사이에 길이 생겼는지 손가락이 아프면 마음도 아파올 때가 있다. 그러면 이내 슬픈 감정이 밀려들기도 한다.
1번과 2번 손가락은 거의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잘 붓지도 않고, 뻣뻣하지도 않다. 하지만, 4번과 5번이 가장 큰 문제다. 아침에 일어나면 3, 4번 가운뎃손가락이 부어 있고, 5번이 뻣뻣해서 주먹이 잘 쥐어지지 않는다. 1번 손가락처럼 붓지도 않고 뻣뻣해지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오늘 유달리 손가락이 더 뻣뻣하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손가락에 집중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밀려드는 일을 처리하고, 점심 식사 후 함께 산책하자는 선생님과 운동장도 다섯 바퀴 돌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신선한 공기가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계단에서 나와 만나면서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언제까지 이 무거운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할지 막막한 마음이 들었다.
사랑하는 중학생 딸은 어젯밤 잠이 들기 전에 나에게 150살까지는 꼭 살아야 한다고 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150살까지 사람이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하지만, 딸은 엄마의 약속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실이 아닐지라도 상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게 마련이다. 마법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빠져드는 것처럼.
며칠 동안 엄청난 눈을 내려놓은 밤하늘엔 별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그 사이로 깜빡이는 별처럼 비행기 두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땅에 오래 머무는 나에게도 그렇지만, 밤하늘을 날아오르는 비행기 조종사에게도 삶은 무거운 것이다. 삶은 계획대로 살아지지 않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가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코스마다 매번 긴꼬리원숭이가 튀어나와 골프공을 엉뚱한 곳으로 던져 놓는다. 불공정해 보이지만 그것이 인생이라는 경기이다. 그럴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어쩌면 그 지점이 최선이자 최고의 시작점인지도 모른다. 무작위로 보이는 그 자리가 바로 신이 정해 준 자리일지 누가 아는가? 신화에서 원숭이는 신의 심부름꾼이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류시화
힘겨운 일이 있을지라도 그 일에 슬픔을 담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은 나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힘든 날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습설은 더 치우기 힘든 법이다. 어쩔 수 없이 내리는 눈처럼 내게 힘든 순간이 찾아오지만, 그 순간에 슬픔까지 추가에 너무나 무겁게 나를 짓누르지 않도록 해야겠다. 류시화 시인은 '삶은 우리의 계획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놀라운 일이 가능하다.'라고 했다.
오늘은 4일째 스테로이드 반 알을 먹고 있다. 저녁에 타크로스 캡슐도 먹었다. 이렇게 강력한 약을 먹는데도 쉽게 돌아오지 않는 내 손가락이 너무 슬프지만, 다시 일어서 봐야겠다.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 가장 슬픈 일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 우울한 마음을 핑계 삼아 책을 읽으러 오는 아이들에게만 주는 맛있는 초코 캐러멜을 두 개나 먹었다. 그런데 그 맛은 그리 달지 않았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캐러멜인데, 단맛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인생의 단맛을 잃어버릴까 두려운 감정이 들었다. 무엇이든 마음의 작용이 있어야 세상의 현상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지금 내가 놓인 이 상황이, 원숭이가 공을 떨어뜨린 지점이라고 생각해야겠다. 무엇이든 해 나가야 한다. 마음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새로운 아침을 시작해야겠다. 분명 아침은 오늘의 무거운 마음을 반 이상 덜어준 채 나를 맞이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