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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연관성

그리움

by 디오니



기억의 파편들로 떠다니다 툭 알은체하고 다가와선 자리를 정하고 앉으면, '오늘은 너야?'하고 써 내려가지는 뭐, 소소한 경험담의 글이니 나의 글쓰기는 굳이 애써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나 자신을 파먹기이다.

그러므로 그때의 그 순간 그곳에 있었던 나를 만나고 오면 되는 시간여행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던 날이 있었다.

프란체스카의 죽음 후,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한 엄마의 일기장 속에서 돼지 품평회를 위해 집을 비운 며칠간, 평범하기만 한 엄마였던 프란체스카의 뜨거웠던 사랑과 격정을 남매는 만나게 된다.


이십 대의 난 안타까운 그리움을 먹고살고 있었나 보다.

나를 방치하고 무의미함 속에 던져놓고 꺼내주지 않았던 내 이십 대.

눈뜨면 출근하고 기획하고 할 말 있어도 삼키고 주어지면 강박성 최선을 다해가며, 이게 아닌데 난 정말 이걸 하고 싶지 않은데, 벗어나지도 못하는 삶에서 프란체스카처럼 어느 날 찾아온 그 순간에 살아난 내 안의 나와 새로운 길에 힘을 싣고 싶었던 것 같다.


남편과 남매를 돼지 품평회에 보내놓고 갖게 된 혼자만의 시간, 여유, 그리고 현관 밖 계단참에 앉아 마시는 레모네이드. 혼자 앉아 있을 프란체스카의 모습을 그려보며 나도 그 계단참에 앉아 넓디 너른 농장을 바라보며 있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난 뭔가 빈 듯한 공허함에 둘러싸였었다.

이 한 문장에서 나는 많이 울었었다.

사무실에서 짬짬이 읽던 책이었는데 주르륵 흐르는 눈물과 콧물 때문에 엄청 곤란했었다.

누가 봐도 울대목이 아닌 건 확실한데.


그러고 보니 토지를 처음 읽게 되었을 때 울었던 장면도 비슷한 것 같다.

월선이 주막 앞 나루터에서 떠나는 용이의 나룻배가 멀어지도록 하염없이 바라보며 우는 대목에서 같이 아파했었던걸 보면, 떠남과 속절없음에 대한 체념에 내 속도 어지간히 비어있었나 싶다.


거기에 더해 내 삶의 기간 내내 떠나지 않고 남아있는 선명한 한컷들, 내 어린 시절, 언니가 일곱 살에 국민학교 1학년 등굣길에 있었던 엄청난 교통사고로 한 살 된 여동생을 데리고 엄마는 원주기독교병원에서 언니와 1년여의 병원생활을 하는 동안 다섯 살이던 난 큰집 오빠네에 맡겨져서 살았었다.

신작로에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버스가 지나갈 땐 멈추지 않을까, 엄마가 내릴까 살피며 신작로 옆으로 두텁게 심긴, 키가 큰 코스모스가 흔들리던 모습과, 신작로 맞은편 그 너른 초록의 논들위로 세찬 장대비가 내리는 모습을 뜨락에 앉아 바라보던 내 모습이 보인다.

겨울이면 눈도 많이 온 저녁 띄엄띄엄 있던 집집의 굴뚝마다 하얗게 뿜어지던 연기도 남아있다.

내 앞의 넓은 공간감을 허전함으로 느끼는 것도 그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지금도 가끔 울컥하니 눈물이 나기도 하는데 내 우울은 유년기에 생긴 게 아닐까 싶다.


이런 기억의 잔향이 남아 프란체스카가 현관 앞 계단에 앉아 농장을 바라보던 모습이 너무 아팠던 거야, 내가.

그래서 용이의 멀어져 가는 나룻배를 바라보며 월선이 휘날리는 치맛자락 붙잡고 울던 모습을 내가 내 그리움으로 같이 보고 있었던 거였네.


이 글을 쓰다 보니 내게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그리움과 공허감과 채워지지 않는 뭔가 아득함이 일맥상통함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채워지지 않는 타고난 뭔가가 있다. 타고난 우울증이 아닐까.

칭찬을 받고 좋은 일이 생겨도 그냥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도 그 좋은 말들이 내 우물 속에 빨려 들어가 없어지고 내 작은 실수에는 너무 깊은 칼날을 들이대어 자책하고 의기소침해지는 내가 있어서 몇 안 되는 지인의 안부전화에 '나 요새 우물 파고 있어요' 대답할 때가 많다.

아홉 개의 실수에도 한 개의 칭찬을 들으면 그 한 개가 자신을 모두 덮어버려 한껏 신나는 사람과 아홉 개의 업무사고를 치고도 그래도 사고 친 거 해결은 해낸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내 기준으로는 뻔뻔해 보이는 자부심을 지닌 지인들을 보면서 정말 정말 그 반이라도 성향을 닮아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었지만 어차피 난 성정이 다른 사람임을 더 깨닫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하루를 돌아볼 때 '감사합니다', '오늘도 잘했어'는 하나의 숙제 같은 의미이다.

이십 대 때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읽고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 영화를 봤다.

과연 작품 속 설렘과 들끎음 자기 통제를 어찌 표현해 낼까 가 몹시도 궁금해서였다.

비 오는 거리 클린트이스트우드의 젖은 머리만으로도 산통이 깨졌다. 이게 아니야. 아니라고. 차라리 작품 속 상상으로 로버트는 남아있었어야 해. 너무나 기대했었던 장면에 대한 실망을 잊으려고 다시 책을 읽었었다.

책에서 안정감을 찾았던 것 같다.


과감하게 자신을 던져 넣은 프란체스카에게 매료되어 난 몇 권의 책을 주문하고 멀리 있는 지인에겐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지인은 내게 말했었다. 이 책을 보고 왜 운 거야?

인생에 한 번은 토지를 읽어보라고 권했더니 1권을 시도하다가 고맙지만 난 아닌 것 같아 했다.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오래전 비움으로 내 책장에서 사라졌지만 그 집의 현관 앞에 다시 앉아보고 싶어졌다. 나는 여전한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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