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작가의 그 문장
비가 오나?
저기 꽃이네.
머리가 더부룩하네. 보기 흉하다.
묵 맛있다. 니도 좀 묵으라.
아부지! 아부지!
춥다. 옷 더 입어라
요새 마이 말랐다. 밥은 묵나
-<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 우리 엄마는 평범한 엄마다
세상 폼 나고 이름 떨치는 삶을 꿈꿨던 딸내미 시절의 나는 우리 엄마가 너무 평범하다고 느끼며 자랐지만, 엄마의 말뚝에서 태어난 나는 세월이 흘러 흘러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만큼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철이 들어가는 건가. 이유는 이렇다. 한번 만나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세상 위인보다 내가 잘 알고 만질 수 있는 현실감 있는 사람 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런 평범한 엄마가 툭툭 던지는 말에는 세상의 지혜가 있다. 책을 많이 읽어서도, 이론적으로 무장되어서는 아닌데, 세상을 살면서 몸으로 배운 지혜가 세월과 버무려져 '자기 인생의 철학자'가 된 것만 같다.
# 그럴 때는 감사한 일들을 먼저 떠올려봐
“엄마, 세상 일이 맘대로 안돼요.”
언젠가 내가 노력한 만큼 성과가 안 나오고,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오고, 정말 세상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더니, 엄마가 한마디 툭 던진다.
“그럴 때는 감사한 일들을 먼저 떠올려봐”.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뻔한 말인데 가슴으로 돌덩이가 '툭'하고 떨어졌다. 안 되는 일, 엎어진 일을 생각하면 속상하기만 하지, 바꿀 수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까지 해온 것들에 대한 감사겠지. 그래야 앞을 보고 더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엄마의 말은 그런 뜻이 아닐까.
# 네가 다친 게 한동안 분했다
발목이 부러져 두 달간 목발 신세를 졌을 때, 엄마는 두 달간 매일 출퇴근하며 나를 어린아이처럼 돌봤다. 삼시 세 끼를 먹이고 목욕시키고 우리 집을 정리하면서. 살가운 딸이 아니었던 나는 학창 시절도, 직장 생활할 때도, 결혼해서도, 방송작가가 되어서도 엄마랑 이런 시간을 보낸 적이 없어서 뒤늦게 어린 시절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내가 아픈 동안 다친 걸 두고 한 번도 속상하다는 이야기도, 운이 나빴다는 이야기도 꺼낸 적이 없던 엄마가 내가 깁스를 푸는 날 한 마디를 하셨다.
“네가 다친 게 한동안 분했다”
엄마식 분노의 한마디. 내 앞에서는 속상한 티를 낸 적이 없는데 표현만 안 했을 뿐 엄마는 내내 마음 졸이고 속상해하셨나 보다. 참았다가 내뱉은 한마디. 그 한마디가 백 마디 말보다 강한 진심이 느껴졌다.
# 편지 봉투에 쓴 부모 마음
엄마는 돈을 주실 때마다 꼭 날짜와 한 마디를 봉투에 적어 주신다. 돈만 쏙쏙 빼 쓰고 모아놓은 봉투가 한가득인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말들이 거기에 있다. 어느 크리스마스날 나한테 선물이라며 오르골과 돈이 든 봉투를 쥐어 주셨다. 웬 오르골이냐고 물었더니,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기분 전환을 하라고 하셨고 용돈 쓰라고 주신 봉투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아프고 힘들고 불편해도 시간은 지나가야 하는 것. 어쩌겠냐. 긍정적 기다림 _부모 마음"
깁스를 한 발목으로 한참 우울하게 집안에서 보내고 있던 그때, 하필 아이도 입시에 실패하는 바람에 배로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엄마가 써주신 한 문장. 찐 부모 마음이었다. 내 자식을 보고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한 부모 마음이 느껴져 눈물이 났다. 엄마의 말은 그런 것들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의 엄마의 마지막 말들
나를 다독이고 나를 일으키고 위로했던 엄마의 몇 마디를 떠올리면서 얼마 전 읽은 책 <엄마의 마지막 말들>을 생각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병간호를 하며 엄마의 마지막 말들을 1년간 기록한 책. 저자인 서울대 박희병 교수는 간병을 위해 휴직을 하면서 엄마의 말을 채집한다. 그리고 엄마의 말속에서 엄마의 기억과 사랑방식을 담담히 관찰하며 엄마가 죽음으로 가는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비가 오나?
저기 꽃이네.
머리가 더부룩하네. 보기 흉하다.
묵 맛있다. 니도 좀 묵으라.
아부지! 아부지!
춥다. 옷 더 입어라.
요새 마이 말랐다. 밥은 묵나
-<엄마의 마지막 말들>, 박희병-
남이 들으면 평범하고 의미 없는 말이지만, 저자인 아들은 안다. 엄마와 살아온 세월 속에 그 말은 추억의 말이고, 맥락 있는 말이고, 힘 있는 말이라는 걸. 내게도 그렇다. 평범하고 밋밋한 우리 엄마의 말이 나한테는 힘이고 사랑이고 눈물이다. 어떤 맥락에서 하는 말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나는 잘 알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의 말이 내 마음을 스칠 때면 따끔거린다. 잔소리라고 여겼던 엄마의 말도 지나치지 말아야겠다고. 나를 키운 엄마의 평범한 말들이 결국 사랑이었음에 잘 듣고 잘 주워 담아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