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단편 - 걸어야 보이는 더 많은 것들
"저기 말이다."
아버지는 고민하다가 운을 떼신 것 같았다.
"네, 아버지. 말씀하세요."
"그게, 너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난 저주에 걸렸단다."
"네?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21세기에 저주라니."
"이 옷을 보렴. 내가 이 옷을 몇 년이나 입었을 것 같니?"
나는 그제야 아버지의 옷을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뜨개질이 촘촘하게 되어있는 검은색에 빨간 체크 니트.
"모르긴 몰라도 십 년 전부터 본 것 같긴 한데요."
아버지는 한 숨을 쉬시며 대답하셨다.
"이 옷은 정확히 삼십 년 된 옷이란다. 내 옷장에는 삼십 년된 옷들이 약 20벌 정도 있고 말이지."
나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와, 그거 대단하시네요. 아빠는 젊은 시절에 멋쟁이셨잖아요. 전 세계에서 손꼽히는 의류 브랜드의 대표셨고,... 옛날 아버지 사진을 보면 흑백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페라리와 람보르기니 등의 빨, 주, 노 색깔이 모두 보였을 정도니까요. 아니, 언제부터 이렇게 근검절약을 하시게 된 거예요?"
아버지는 다시 크게 한 숨을 쉬셨다.
"조금 전에 말했잖니. 난 저주에 걸렸다고. 무척 미안하게 되었구나. 얘야."
"저에게 조금도 미안하실 거 없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저주길래 그래요?"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한 창 젊었던 시절이었어. 당시의 나는 돈도 많고, 나름 정치계 쪽에 힘도 있고 해서 두려울 것이 없었단다. 당시 파리 컬렉션에 초대를 받아 쇼를 보고 나와 차에 타려는데, 허름한 차림의 한 노파가 내가 가지고 있는 시계를 자신에게 주면 나를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다지 뭐냐. 하지만 나는 노파에게,
라고 말했어. 그리고 나는 내가 한 말에 스스로 도취해 있었지.
노파가 말했어.
"흥!!! 내 제안을 거절했다 이거지? 당신은 당신의 30번째 생일날부터 그전에 입었던 옷을 제외하고는 어떤 옷도 입지 못할 것이오. 이 저주를 풀려면 두 가지를 지켜야 하는데 첫 번째는 당신의 70번째 생일에 당신의 아들이 이 저주를 대물림받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입은 이 원피스와 같은 옷이 잘 어울리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요."
라고 말하고는 절뚝절뚝 걸어서 사라졌지 뭐냐."
"네? 설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아버지의 고개는 자라처럼 어깨 안으로 더 들어갔다.
"너는 곧 내 옷을 물려받게 될 거야. 미안하구나."
"안돼요. 아빠. 저 다음 달에 밀라노 가서 쇼도 봐야 하고 새로 나온 옷과 소품도 사야 한다고요. 마르지엘라나 헤뮬랭,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이 꽤 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요즘 엉거주춤한 샤넬이나 맥퀸보다는 퍼포먼스도 재미있고. 게다가 최근 사고 싶은 시계도 몇 개 있어서 스위스도 들려보려 했단 말이에요. 도쿄 다이칸야마의 플리츠플리즈 맨즈 봄 신상도 나왔고,.. 아, 아버지."
"미안하구나. 그리고 바로 오늘, 지금이 내 70번째 생일이란다."
나는 숨이 막혀왔다.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옷들이 갑자기 날 간질이기 시작했다. 나는 너무 간지러웠다. 너무 간지러워 아버지의 배꼽이라도 빌려야 할 판이었다.
"견딜 거야. 견딜 거야!! 패션을 위해 이 정도쯤은.. 풉, 푸하하."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나는 결국 아버지와 옷을 바꾸어 입었다.
"아버지, 이런 남루한 옷을 입고 여자를 만날 수는 없어요. 어떤 여자가 이런 옷을 입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혼까지 하겠어요?"
아버지는 내 옷으로 갈아입으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옷이 중요한 건 추울 때만 이란다. 너도 빨리 이 남루한 원피스가 어울리는 여자를 찾거라."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버지의 30년 된 옷은 여전히 내 옆 옷장 위에 차곡차곡 잘 해어져 나를 지켜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