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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ug 26. 2024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뿌리에게

                                              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는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서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 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잡고 더 넓게 게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이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테니.



'제가 너무 제 자식만 생각하는 건 아닌가 싶네요.'

 유독 유약한 아이의 엄마가, 자신의 아이를 특별히 신경써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아이가 학교생활을 하면서 주의해야 할 여러가지 항목들을 전해주면서 보낸 메시지다. '난시가 심하니 공놀이는 주의하도록 해주세요. 요즘 감기가 유행이던데, 혹시 반에 다른 아이들이 기침을 하면 마스크를 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등등 조목조목 적어 알려주셨다. 누군가는 유난스럽다고 할 수도 있지만, 어렸을 때부터 유달리 약한 자기 자식을 위해 이정도 이야기도 못할까.

 아이가 아프면, 부모의 모든 신경은 아이에게 쏠린다. 비싼 약값보다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우리 아이 팔뚝에 늘어나는 주사 자국이 부모를 미치게 만든다. 더 안타까운 건 이제는 병원이 익숙해져버린 아이의 모습이다. 의사 선생님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고, 간호사 누나들과 친근하게 인사를 나누는 아이의 모습이 부모는 그저 안쓰럽다. 밝게 뛰놀아야 할 어린 시절에, 병원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아이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다.

 이렇게 힘든 시기를 몇 년 간 이겨내고 이제서야 하루 이틀씩 학교에 나오게 되었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하루 종일 종종대며 아이를 기다리고 계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가끔 전화를 드리게 되면 목소리에 긴장한 듯한 미묘한 떨림이 역력하다. 혹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것은 아닐까, 쓰러진 건 아니겠지, 감기에 걸렸나 하는 오만가지 생각을 하신다고 한다. 별 일이 아님을 확인 받고 나서야 목소리는 비로소 밝아진다.


 흙은 뿌리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건 어떻게 보면 본능에 가깝다. 뿌리를 너무 사랑해서,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은, 자신의 뿌리에게 밝은 피를 뽑아 흘려보내며 즐거움에 떨기도 하고,  혹시 목마르지 않을까 자신의 피에 발 적시며 자신을 뚫고 오르게 돕는다. 뿌리가 더욱 성장하여 척추를 휘어 접고 더 넓게 뻗으면, 고통스럽지만 뿌리가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한다.

  이렇게 완전하고 숭고한 희생과 사랑이 인간사에 또 있을까? 어떻게 자신의 피를 뽑아 흘려보내면서 즐거움에 떨 수 있을까? 이렇게 사랑만 주던 흙은 어느새 거무스레 늙어버렸다.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으로 남아, 뿌리가 성장해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만 있다.


 "선생님. 옆 반 학생들이 저희 엄마 마트에서 알바한다고 놀려요. 저만 보면 00마켓, 00마켓 이라고 해요."


 이 소식을 듣고 교무실에 온 한 어머니는, 자기 자신보다도, 자기 아이가 받았을 상처에 눈물을 쏟는다. 자신에 대해 함부로 말한 그 아이들이 너무 미우면서도, 더한 조치를 취하면 혹시라도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할까봐 뭇내 망설인다. 엄마가 마트에서 일을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하는 아이에게 엄마는 죄인밖에 더 될 것이 없다.

 자신이 마트에서 일하는 게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하면서도, 생계를 위해 마트에 나갈 수 밖에 없는 어머니. 평소 이야기할 대상이 많지 않아서인지 몇 번밖에 마주하지 못한 딸의 담임 교사에게 한 시간동안 하소연하셨던 어머니. 남편을 만나고 고단했던 삶과, 그럼에도 빛나는 새벽별 같은 딸, 딸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던 나날들, 해결되지 않는 집 계약 문제, 딸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


 '너가 자라나기에 충분히 좋은 흙이 아니라서, 너무 너무 미안해.'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도 더 주지못해 안절부절 못하는 흙의 마음이 안쓰럽다.



 올리비에 드브레, <풀밭 위의 소녀>(1940)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 그림을 색다르게 바라봐보자. 이제는 너무나 흐릿해져버린, 그때 내가 어떤 표정을 지었었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모든 어머니들의 유년시절로 해석해 볼 수 있지는 않을까?

 시간이 흘러 어느새 어머니가 돼 버린, 천진난만하게 풀밭을 뛰놀던 소녀들에게 이 짧고 서툰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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