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설치전-6 10화

6-10. 나란 존재감

by moonrightsea

'어떻게 울타리가 되어 주지? '


연우를 만나다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나는 집도 없고 그렇다고 모아둔 돈도 없고 기껏 해봐야 미술관 인턴이 다인데 생활비도 부족해서 저녁에 편의점 알바라도 하고 싶은데 연우가 못하게 해서 보통 난감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돈이 안 드는 것도 아닌데 곧 희경도 결혼을 하면 나도 집에서 나가야 할 건데... 희경은 괜찮다고 하지만 막상 희경도 만나는 남자와 살림을 합치려면 그가 사는 집에 들어간다 해도 그동안 잠시 나한테 머물면 된다고 하지만 이대로는 답이 없다. 학자금 대출도 남았고....


'하.. 현실은 너무 냉혹하기만 하네. '


우선. 연우를 설득해서 저녁에 알바를 다시 하고 주말 알바라도 더하면 방을 구할 돈은 생길 테니 그렇게 방을 구하고 음.. 큐레이터가 되면 월급이 상승할 테니 조금만 버티면 안정적인 수입원이 생기고 한 5년은 더 모으면 그래도


'전세는 구할 돈이 되겠다.'


힝. 그럼 내가 몇 살인 거야? 하아... 그럼 연우랑 살림을 합치면... 음. 그건 결혼을 해야 하는 문제인데... 아직 프러포즈도 안 받았고... 그냥 그렇게 결혼하기에는 내가 그에게 울타리는커녕 완전 민폐 식객인데... 그것도 싫은데...


혼자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이 답이 없었다.

연우와 자연스럽게 사귀기 시작하면서 벌써 넉 달이 훌쩍 지나갔는데 갈수록 나는 걱정만 늘었다. 왠지 다음 달만 지나면 나이만 한 살 더 먹은 내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져 더 초라하게 느껴지고 자꾸 주눅이 드는 건 뭘까.


" 오늘은 왜 이렇게 기분이 축 처졌어?"




연우가 걱정스레 내게 물었지만 막상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렇다고 할 명쾌한 해결책도 계획도 없는 상황에서 마냥 기분 좋게 데이트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 나 알바 다시 해야겠어요."

" 그건 안돼. 너 곧 있음 큐레이터 선발 시험도 있고. "


" 그건 준비 다되었고. 이대로 계속 오빠도 나도 그냥 있을 수는 없잖아요. 맨날 돈 아낀다고 청승 부리는 것도 이제 한계고."

" 괜찮대도. 너 먹여 살릴 정도는 충분히 벌어. "


걱정스러운 내 얼굴이 못내 못나보였을까 봐 그게 더 걱정인데 그는 환하게 웃으며 포근히 감싸 안아주었다.

" 우리 아기 다 컸네. 이 오빠 걱정도 다해주고 잘 컸다. 이제 딸은 졸업했네. "


" 희경이도 만나는 사람이랑 곧 결혼할 거라 둘이 살림 합친다고 해서 그런데... 나 오빠 집에 들어가서 살까요? 오빠는 어차피 숙소 생활하니까 희경이 한테 주던 월세를 오빠한테 주고 합쳐서... "


" 그게 그렇게 걱정되었어? 아휴... 도대체 이 머릿속에는 뭐가 든 거야? 일단 가자. "


그는 크게 한숨을 쉬고는 차를 몰아 봉천동으로 갔다. 즐비한 아파트 사이. 채 주차할 곳도 없는 그곳 갓길에 그는 차를 세우고는 나에게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언덕 위에 아파트를 가리키며,


" 보여? 저기 저 라인에 저 집이 내가 전세를 준 집이야. "




" 응? 언제 오빠가 집이 있었어요?"

" 네가 안 물어봤잖아. "


" 그럼 지금 사는 집은요? 그럼 그 집 월세를 내면서 아파트도 있으면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해요."


" 휴우... 네가 몰라서 내가 관심 없는 줄 알고 말 안 해왔던 거지.

서울에서 집을 살려면 절대 그냥은 안돼. 투자도 해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해. 그래서 애초에 부모님이 주신 종잣돈으로 주식도 사두고 생활비 나가는 거 아끼려고 지금 있는 자취방도 그냥 그 건물자체를 산거고. 물론 대출을 끼고는 있지만.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간 연우가 돈을 쓸 때면 그렇게 큰돈을 쓴 적이 없었다. 그는 늘 돈을 쓴 것이라고는.... 내게 그때 레스토랑 데려간 거랑 호텔이랑... 그가 차를 산거...내 생일.. 음? 그러고 보니 편의점에서 물도 잘 안 마신 거 같기는 했다. 나에게 무엇인가 해줄 때 말고 그가 어떤 물건이나 하다 못해 시계며 옷조차 사는 것을 본 적이 없으니. 맨날 숙소에서 후배들에게 구박받아가며 그렇게 삐대서 자고... 와 이렇게 독하게 모았구나.


그러고 보니 이해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는 매번 내게 그의 자취방이 아니면 집에 데려다주었고 주말에 만나면 그냥 한강에 가서 돌거나 남들이 보는 영화도 우리는 안 봤다. 왜냐면 영화관에 처음 갔을 때 연우가 잠이 드는 바람에 코를 너무 골아서... 그 이후 나는 다시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았거든.


쪽팔려서. 그래서 만나면 항상 걷는 걸 좋아하니 둘이 계속 걸으며 이야기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아니면 그의 자취방...


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 근데 왜 오빠는 친구를 한 번도 소개 안 해줘요?"

" 휴우. 소개해 줬잖아. 그때 회식자리에서."


" 응?"

'소개를 해줬다고? 언제?' 머릿속에 그 생각이 들었는데


" 병원에서 맨날 보는 녀석들이고 회식자리 가면 너 보는데 뭐 하러 따로 보냐."


" 아. 내가 대리기사 하러 가면 대리비 넉넉히 주셨던 분들? 그럼 그분들이 오빠 친구분들이었어요?"


그의 말에 생각해 보니 늘 그가 불렀던 회식자리 대리기사로 나가면 그의 일행들이 다가와 웃으며 안전운전을 부탁한다며 내게 팁이라고 돈을 더 얹어주고는 했다. 팁이라기에는 가끔은 대리비보다 더 많은 돈들이었지만 그저 나는 여유있는 사람들이라 그렇게 주는 거겠거니 생각에 아무 의심없이 넙죽 받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는 아무말 없이 운전대로 가 바로 연우를 태우고는 사라져 버렸었는데...


" 그럼 인사라도 시켜줬어야죠. 뭐야. 맨날 야구모자에... 화장도 안 하거나 엉망으로 입구 갔는데..."


" 훗 그 자식들은 이미 알아. 그리고 내색이라도 했으면 너 또 도망가서 사라지면 후우... 아마 그 자식들이 더 난리 쳤을걸? 당직 안 바꿔준다고?"


" 아... 그럼 그 사람들 주말 당직도 오빠가 대신 서줬던 거예요?"

" 그야. 너 한참 찾으러 다니고 할 때나 몰래 너 만나러 나올 때 대신 서줬으니까."


" 아 미안해서 어떻게.. 난 그런 것도 모르고..."

" 그러니 제발 도망이나 잠수 좀 그만 타세요. 사람 애간장 좀 작작 녹이고."




차를 몰아 커피숍으로 가려는 그를 굳이 데리고 나는 한강둔치로 갔다. 언제나 오던 데이트 장소.


" 왜 안 하던 짓을 하려고 해요. "

" 넌 왜 맨날 내가 커피숍 가자고 하면 안 된다고 그러는데."


" 난 자연이 좋아요. 풀내음. 달리거나 걷는 사람들. 항상 준비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구경하고 관찰하는 게 제 취미잖아요.

사실 오빠가 아까 그런 이야기 말하기 전까지는 말 안 해왔는데 오빠가 이렇게 짠돌이로 사는 거 말하지 않아도 아는데 나한테만 돈 쓰게 만드는 건 더 싫었거든요. 난 그러지 않아도 행복한 곳을 알고 행복한 사람이랑 있으니까. 그거면 충분하니까."


" 그래서 우리가 맞는지도 모르지. 이렇게 밤낮으로 므흣."

" 부럽지 않아요? 친구들 사는 것 보면?"


" 왜 부러워해야 하지? 나와 다를 바 없이 그냥 살아가는 건데? 그냥 그들은 그들의 인생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거고. 나는 내 나름의 인생과 쾌락과 목표를 추구하는 건데."


" 오빠 인생 목표는 뭔데요? 개원 말고."

" 개원은 음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하지. 하지만. 그건 목표가 아니야. "


" 그럼?"

" 그건 내가 선택 한 길로 가는 방향일 뿐인걸. 내 목표는 내 도움이 필요한 환자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삶이 조금 더 나아지길 바라고 뭐 암튼 그것도 아니야. "


" 뭐야. 분명한 것 좋아한다던 사람이. 왜 이렇게 목표가 자꾸 바뀌어?"

" 흠 그건 누굴 만나서 그렇지. 내가 목표한 누구."




" 누구? 나? 내가 오빠 인생 목표예요?"

" 응."


" 사람이 어떻게 목표가 돼요. 그 목표면 이미 얻었잖아요. 칫."


" 아냐. 아직 너를 전부를 안게 아니니까. 한참 멀었어. 너 정보 수집하느라 내가 얼마나 애먹었는지 알아?"

" 정보? 그건 무슨 말이에요? 음? 혹시 경윤이?"


그는 씩 웃었다. 그래서 그 둘이 그렇게 친해 보였구나. 내가 걷는 거 좋아하는지도 알고. 술 먹고 한 번도 필름 안 끊긴 것도 그래서 그날 이후 그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제법 많은 것도 알았구나. 하아...


" 하아.. 이 사람 무서운 사람이네. 뒷조사하고. 말해봐요. 그날 경윤이랑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 뭐. "


" 왜 나 오빠 방에서 잠들고 나 재우고 둘이 말했다며 술 먹고. 응?"

" 아 그거? 음. 별 거 없었어. 너도 레스토랑에서 들었잖아. "


" 그거야. 뭐 둘이 그 뭐냐. 스포츠 이야기하고 그 또 뭐랬드라 암튼 막 경윤이 회사이야기하고.. 그거 말고."

" 그거 말고 뭐?"


" 둘이 내 이야기한 거잖아요. 무슨 말을 했길래. 오빠가 경윤이 부탁을 다 들어준다 그래요?"

" 야. 네가 더 무섭다. 그 말이 기억나?"


" 흥. 나 기억력 무지 엄청 좋다고요. "




" 음. 그거는 사실 남자들끼리 이야기였는데... 흐음.. 그날 사실 술 먹으면서 내기했거든. 너랑 먼저 연락이 닿아서 계속 전화를 하는 사람이 나중에 부탁 들어주기로."


" 그래서 오빠가 경윤이 부탁 들어 준거예요?"


" 뭐 일종에 딜이지. 너를 차지하는 대신 상대편 부탁 들어주는 거?"

" 헐 그때는 우리 사귀기도 전인데.. 암튼. 아 이 오빠 알수록 대책이 안서네?"


" 뭐가 알수록 대책이 안서."


" 너무 스케일이 크잖아요. 너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야. 아주. 너무 부담스러워. "


내가 토라진 듯 화를 내며 고개를 돌리자 당황한 연우는

" 야. 너 제발 그런 뉘앙스 좀 풍기지 마. 아니다. 그런 말이라도 이제는 하니까 대비라도 되겠다. 도망갈 수도 있겠다. 이런 예상. 다른 여자들은 그런 조짐이라도 보이는데 넌.. 뭐.. 전혀 없었으니."

" 칫."


순간 화가 났다.


다른 여자들과 비교라니. 그간 오빠의 연애사를 아는 나로서는 도대체 그녀들이 풍긴 조짐이 뭔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은데 왜 화는 나고. 마음은 상한지. 뚱한 표정으로 있자 그가,




" 말해. 너는 말하잖아. 응? 뭐가 또 불편하게 만든 건데?"

" 아니 오빠는 왜 사람을 술술 불게 만들어요? 왜?"


" 네가 술술 말하잖아. 마음 풀리면 안 그래? "


그러면서 은근 내 옆구리를 쓱 당겨 허리를 감싸 안는다.

그런 그의 편안한 품이 좋아서 그렇게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말을 사심 없이 그에게는 해왔는지 모르겠다. 그는 그럴 때마다 늘 내입장에서 내 생각과 판단에 가깝게 고민해서 배려해 같이 고민하고 판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해 줬으니까.


" 근데 미란언니랑 저랑 그렇게 달랐어요? "

내 엉뚱한 질문에 당황한 그가

" 왜? 갑자기?"


" 생각해 보면 사실 오빠가 이렇게 알뜰히 살아온 건 내가 오빠 서울 올라왔을 때부터라 오늘 듣기는 해도 전에 만났을 때도 그렇게 살고 있었잖아요. 언니정도 제력이면 충분히 오빠가 그렇게 안 해도 되는 거 알았을 거고 서로 사랑했는데 그렇게 힘들게 헤어지는 것도 봤고. "


" 그때 서로는 서로가 맞지 않다는 걸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알았거든. 너무 다른 배경, 너무 다른 생각, 서로 원하는 바가 틀려도 사랑은 맞았는데 그것보다 더 서로를 힘들게 한건 둘다 자신을 포기할 만큼 서로를 사랑할 자신이 없었다는 거지. 둘 다."


" 아... 알 것도 같은데 아닌 것도 같은데요?"

" 어떤 면에서?"


" 사실 그렇잖아요. 서로 사랑하는데 만약에 남편 대신에 죽어라고 하면 누가 대신 죽겠어요? 그럴 수 있는 게 몇 명이나 된다고. 같이 오랜 세월 산 부부도 쉽지 않은데. 하물며 연인이... 말도 안 돼. "




" 맞아. 그래서 헤어진 거야. 어쩌면 배우자가 된다는 건 그런 시험대나 마찬가지지. 결혼을 하려고 준비를 해보니 알겠더라고. 미란이네 집에서 그렇게 반대하고 그런 반대에 미란이 마음이 바뀌고 나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구 그래서 헤어져 보고 또 그리워 만나보고... 그런데 말이야. 희한하게. 안 그런 사람도 있더라고."


" 안 그런 사람요?"


" 응. 그저 그렇게 미치도록 사랑하지 않는데도 그냥 친구, 아는 사람인데도 발 벗고 나서서 자기 일처럼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자신이 아픈지도 모르는 사람 말이야. "


" 에이 그런 착한 사람들은 주변에 많아요. "

" 근데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자신을 버리면서 그렇게 하지는 않거든. 어떤 때는 자신을 버리기만 하기도 하지만 말이야. "


" 사람 사는 게 그렇잖아요. 어디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성장하고 하는 거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지키려 하고 또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도 주고 그래서 자신도 상처받고 누군가 도움도 받고 치유도 되는 거고. 그게 사는 거잖아요. "


한참을 말하는데 그가 옆에 없어 보니 내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그런 그를 향해


" 뭘 그렇게 물끄러미 봐요."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 너 보고 있는데?"




" 칫. 내가 뭐가 볼게 있다고. 사실 오빠 오기전에 나 오빠 생각하면서 오빠가 꼭 울타리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도 오빠한테 울타리가 되어야 겠다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 왠 울타리?"


" 늘 나를 걱정해주고 언제나 곁에서 묵묵히 힘들때면 달려와 나를 달래주고 감싸주고 늘 그래왔으니까. 그런 사람이 곁에 있었는데...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늘 미안하고 뭐든 오빠한테 해주고 싶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게 없더라구요.

그래서 열심히 찾아본다고 했는데... 오빠 병원에 가도 자취방에 가도. 오빠랑 이야기를 하면 할 수록 더. 근데 오늘 보니 더 그런거에요. 울타리에 울은 커녕. 오빠한테 짐만 되는 건 아닌지. "


그와 걷다보니 한기가 몰려왔다. 연우를 돌아보니 우수에 젖은 눈빛으로 그는 막 내게 무엇인가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내 밀려드는 한기에


" 오빠 너무 추워요. 안주면 안될까요?"

" 크핫. 이리와. 내 울타리. "


" 아직 울타리가 부실하다니까요."

" 그래서 더 큰울타리로 안아주잖아."


그의 품에 안겨 서둘러 차에 오르며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내게 무슨 말을 하려던 걸까. 그때.

나는 그에게 어떤 존재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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