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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뚜니 Oct 27. 2024

말 많은 '임산부 배려석'에 대하여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임신과 출산(3) 

저 임산부인데 자리 좀... 말하지 못한 속사정


임산부 배려석은 최고의 정책이다. 임신을 하기 전까지 임산부들이 오래 서있는 걸 힘겨워하는지 알지 못했다. 특히 겉으로 임신한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의 경우, 아직 배가 무거운 게 아니니 컨디션이 임신하지 않았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었다. 때론 무지함도 잘못이니, 이건 내 잘못이자 예민하지 못한 감수성을 탓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임산부가 되어서야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지하철을 한두 번 탄 게 아닌데, 임산부가 아닐 때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지하철 안내 음성이 귀에 쏙쏙 박혔다.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지하철 내에선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두는 것이 가장 큰 배려입니다'라는 안내 음성이 나온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방송이 아닌, 늘 나오던 방송일 테지만 임산부가 되어서야 이런 안내방송이 있다는 걸 인지했다. '지금 이 방송이 귀에 박히는 건 나 같은 임산부뿐이겠지'


임산부 배력석은 비어있을 때보다 임산부가 아닌 사람들이 앉아 있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대개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앉아있었고, 간혹 남성도 자리를 차지하던 때가 종종 있었다. 


스스로 제법 할 말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40주 꽉 채운 임신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한 적은 없다. 요즘 칼부림 사건이다 뭐다 해서 공공장소에선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시선이 내게 쏠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자리 좀 비켜주세요'라는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신체적 약자일 수밖에 없는 '임산부'임을 굳이 티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또 요즘 각종 커뮤니티에서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 말 그대로 '배려석'인데, 배려는 의무가 아님에도 자리를 비켜달라고 말하는 임산부를 비난하는 내용의 글을 여럿 봤던 터라 입 뻥긋하기 망설여졌다. 


솔직히 말하면 몸이 너무 힘드니 그냥 알아서 자리(임산부 배려석) 좀 비켜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이 같을 순 없다. 물론 일반석인 자신의 자리를 선뜻 양보해 주거나 미처 자리가 난 사실을 모르고 서있는데 저기 가서 앉으라고 안내해 준 고마운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분홍 배지를 단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겐 '자리 좀 양보해 주세요'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보일까 봐 웬만하면 비어있는 임산부 배려석을 찾아 여러 칸 이동해야 했고, 겨우 자리에 앉은 날이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임산부 배려석이 없었다면 대중교통 이용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임산부마다 물론 다르겠지만, 나를 포함한 일부 임산부들은 사람 많은 대중교통에서 서있는 것조차 힘겨울 때가 많다.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갑자기 숨이 막힐 듯 답답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컨디션일 때도 적지 않다. 


택시를 타고 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차가 엄청나게 막히는 출퇴근 시간에 대중교통으로 가면 금방인데 차 타면 한참 걸리는 거리를 택시 타고 다니는 게 쉽지는 않다. 물론 임신 기간 동안 택시도 많이 이용하긴 했는데 임산부임에도 지하철을 이용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임산부에 대한 감수성... 우리는 어디쯤에 있을까


우리는 늘 그 자리에 있어봐야, 그 처지가 되어봐야, 직접 경험을 해봐야 비로소 안다. 그전에도 물론 알 수 있겠지만, 그건 그냥 머리로 아는 것이고 마음으로 느끼는 건 다르다. 


고백하자면, 임신하기 전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적이 한 번도 없냐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이동 중 노트북 펴고 갑자기 일해야 할 때가 있었는데, 임산부 배려석밖에 자리가 없으니 그냥 앉은 적이 몇 번 있다. 분홍 배지를 달지 않은 내가 꾸역꾸역 주변 눈치를 보며 임산부 배려석에 앉을 땐 임산부가 오면 바로 비켜줘야지 생각하지만, 막상 일에 집중하다 보면 누가 타고 누가 내리는지 잘 보지 않게 된다. 그런 나를 보고 어떤 임산부는 긴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진다. 


남녀를 나눠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임신 가능성이 있는 젊은 여성인 나조차도 임신을 겪어본 후에야 임산부 배려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봤고, 그것의 필요성 그리고 배려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임산부가 아닌 주변부 혹은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사람들의 감수성은 어디쯤에 있을까.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에게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정책이다. 이 자리는 지하철 안내 음성대로 그냥 비워두는 것이 가장 큰 배려다. 이것이 곧 임산부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일 것인데, 우린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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