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유감

순우리말이 왜 귀하게 느껴질까

by 포레스임


들깨, 오이, 무청, 고추, 상추, 무, 서리태, 콩, 쑥갓, 시금치, 얼갈이배추, 부추, 호박, 당근........,


농협 로컬푸드 마트에 잠시 들렀다. 진열된 품목을 살피니 반가웠다. 물건이 아닌 이름이 좋았다. 한자를 덧대지 않아도, 영문표기도 없으니 말이다. 오로지 간판의 '로컬' 그리고 '푸드', '마트' 등이 외래어로 좀 거슬린다. 로컬을 '지역' 푸드는 '먹거리', 마트는 '가게'........, '농협 지역먹거리 가게'? 좀 이상하긴 하다.


문화 주변국으로 살아온 세월이 유구하다. 새삼 우리말을 찾는 나도 어이가 없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닌, 한자문화권의 국가는 모두 같은 운명의 처지니 말이다. 이웃 일본은 우리로 치면 신라의 이두와 같은 한자문화권 국가임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언어를 쓰고 있다. 그나마 조합형 소리글자를 갖고 있는 우리가 얼마나 다행인가.


언어는 보수성을 띤다.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국립국어원의 언어정책도 지루한 시간의 흐름이 있고서야 비로소 어학사전에 등재시키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너무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중(言衆)들의 언어사용을 지켜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묻혀가는 고유어를 적극적으로 되살리는 정책은 정령 불가능 하기만 한 것일까.


종합편성채널의 증가 후 볼거리의 증가는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너무 상업적이고 대중추세를 맞추다 보니, 언어의 사용에 있어서 비교육적인 면이 많이 보인다. 한국어는 어쩔 수없이 한자권이나 영어권의 문화를 추종할 수밖에 없는 비문화권 언어의 숙명을 타고 태동했다. 인구나 국력의 한계가 이미 그렇게 결정된 빌미의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수없는 시간 속에 우리의 민족성이 유지되고, 다른 민족과 차별화되는 언어와 글자가 왜 현재까지 전승되었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조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영화 '말모이'를 본 적이 있다. 한창 인기 있는 배우 유해진과 윤계상의 케미가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주제로 엄혹한 일제강압기의 광기가 번득이는 시대상과 우리말을 지키려는 선조들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말과 글자는 혼(魂)이자, 한 민족의 양보할 수 없는 정수(精髓)이다.


'자크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라고 갈파했다. 즉, 언중이 사용하는 언어는 집단 무의식의 조건을 이루며, 언어활동이 없다면 무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는 도식이 형성된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은 이를 간파했기에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 사용을 억누르고 눈엣가시 같은 어학회 활동을 금지했던 것이다.


시류에 편승하는 언어사용은 우리말을 오염시킨다는 생각이다. 남들이 쓴다고 의미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 하다 보면, 우리의 귀하고 애틋하게 지켜온 말과 글들이 훼손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또한 이곳에 글을 쓰면서 의식도 없이 몇 가지 근거도 없는 외래어를 쓴 적이 있다. 독자를 의식해서 쓸 수밖에 없다지만, 순우리말로 쓰인 글이 읽기에 더욱 편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땅히 반성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란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
(목숨 1. 김훈작가의 글 중)

작고하신 이어령 교수님이 말하길 작가인 김훈의 글만큼 한국어를 잘 쓰는 이를 보질 못했다 한다. 산문집 한 권을 구해 열심히 필사도 하고 회독을 하는데 어느 정도나 글이 늘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언어는 경제성을 띤다. 너무 길게 말하는 것이나 쓰는 것보다 짧으면 간단명료하니 좋긴 하다. 우리 국어가 한자어를 오랫동안 써오면서 한자의 축약력에 매료되어 잃어버린 순우리말이 얼마나 많았을까 생각해 본다. 최근 어두만의 줄임말은 단어수도 줄이고 축약력이 있어 활발히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뜬금없는 축약적 어두사용은 은어(隱語)로 비칠 수 있다.


사실 방송에서 더더욱 부추기는 통에 이해 못 할 줄임말이 너무 많아졌다. 너목보(=너의 목소리가 보여), 운널사(=운명처럼 널 사랑해), 뮤뱅(=뮤직뱅크), 우결(=우리 결혼했어요) 그 외 등등, 수없이 많은 줄임말들이 있다. 귀찮아서 검색도 하기 싫을 정도로 많았다. 의미도 모르겠고, 당연히 소통도 안된다. 한자는 뜻글자이니 유추라도 할 수 있지만, 우리말은 소리글이니 터무니없는 줄임말은 오히려 언중(言衆)들의 의사소통을 저해할 뿐이다.


현대의 언어정책은 뭔가 다른 각도로 수립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일단 속도가 너무 빨라져 언중들에게 전달되는 정보의 양과 속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말과 글은 자칫 국적불명의 외계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글이 창제되고 많은 우여곡절 끝에 우리 국어로 지정이 되고 나서 뺏으려 하고, 지켜오는 동안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다. 내가 무심결에 쓰는 말은 누군가의 눈물로 지켜낸 무의식의 조각들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글날이 가까우니 단상적인 글을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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