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 오늘은 날씨가 흐리고 비가 계속 오고 있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무던히도 내리고 있었다. 아직 11월의 중순이건만 날씨는 이미 한겨울같이 움츠러들게 하고 있었다. 오후의 회사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퇴직한 K의 전화였다. 얼마 전에도 그와 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형님! 몸이 아파서 입원해야겠어!"
"그래! 어디가 얼마나 아픈 거야!"
"몰라요! 하여간 병원 가서 진찰받아보고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K와의 이런 통화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벌써 퇴직을 한지 두해 전이다. 그의 근황에 대해 근무를 하면서 이런저런 소문이 들려왔다. 엉뚱한 짓을 자주 한다는 소문 등이었다. 사실 K는 공채로 들어와 근무도중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정신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나보다 이태전에 먼저 입직을 한 선배이기도 하고, 유난히 나를 따르는 동생역할을 자처하기도 해 난감한 적도 많았다.
정신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잘은 모르나 식사 후 복용하는 알약의 양으로 봐도 범상치 않았다. 그와의 인연도 아득한 시간이 되어간다.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 혼자 결정하질 못했다. 업무도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짐을 옮긴 다든지하는 잡무가 그의 몫이었다. 절대 중요한 업무는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누가 시키든지 공손한 태도였다. 그마저도 없었다면 그는 이미 강제퇴직 됐을 것이다.
오래전 겨울이면 사무실이 추우니 기름수령을 할 때도 항상 그가 타오곤 했었다. 누군가 그에게 붙어 지도를 해야 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정상인이라면 뻔한 이야기도 그에겐 새롭고 신기하게 들렸는지 연신 질문을 해댔다. 혹여 안 좋은 마음으로 그를 대하면 분명히 작지 않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 그가 안쓰러워 누구든 돈에 관해 말을 하면 절대 빌려주지 말라는 것과 급여관리 잘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고 장난을 치는 것까지는 막을 순 없었다.
나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 서른을 넘겨 뒤늦게 현직에 들어왔다. 하지만 한창때의 총각인 직원들은 이성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K를 포함한 총각 녀석들이 무슨 얘기를 킬킬거리더니 K가 비서실에 다녀오겠다고 했다. 민원전화에 정신이 없어 그를 따라가지 못한 게 내 불찰이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맘에 드는 여직원이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고 K가 물었단다. 누군가 꽃다발 하나 바치고 "결혼합시다!"라고 말하면 된다고 K에게 말했다고 한다. 바로 나에게 비서실에서 항의 전화가 왔다. 한창 바쁜 시간에 직원인 듯한 사람이 들어와 여직원에게 꽃다발을 던지며 결혼 얘기를 꺼낸다고 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것 같은데 어떻게 그동안 근무를 하는 거냐며 따져 물었다. 아득한 정신을 추스르고 선임과 올라가 사죄를 하고 자초지종을 말해줘야 했다.
K는 누군가 꼭 보살피며 근무를 시켜야 했다. 사실 민간회사였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와 다른 근무처로 옮길 적엔 내심 걱정이 되었다. 연변처녀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곤 그저 무탈히 잘 살기를 바랐다. K가 생태공원 근무를 할 때 염전일을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소금수레를 끌어주고 견본 소금박스를 받는다는 등의 소문이었다. 공원본부에 전화를 해 직원들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다시 원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에 안도하였다. 근무처는 달라도 K는 간간이 자기의 소식을 전하곤 했다. 딸을 낳았다고 자랑도 하고, 아내가 집을 나가 안 온다는 등의 얘기도....,
K와의 통화는 썩 달갑지 않았다. 어쩔 때는 일부러 그와의 통화를 피했다. 한동안 연락이 없기에 잘 지낸다고 생각하였다. 이혼을 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딸아이를 아내가 데리고 나갔다고 울면서 전화를 했었다. 그러다 아직 정년이 한참이나 남은 그가 퇴직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사업소에서의 근무와 가정사가 K에게는 버텨낼 재간이 없었던 것 같다.
어느 여름날 전화기 넘어 K의 목소리는 슬픔에 잠겨 겨우 운을 띄었다. 딸아이가 보고 싶다고 한다. 나 또한 딸애 하나만을 키운 입장에서 동감이 갔다. 아버지로서 접견할 수 있다는 얘기 등은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떠도는 그림자 같았다. 실체는 없고 존재는 하는......., 하지만 존재의 그림자로 살아가는 그에게 나 같은 부류의 말이나 충고는 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형님! 집이 어디라고 했지? 나 좀 만나줄 수 있어요?"
통화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대뜸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그동안 가끔 통화는 했어도 그런 말은 처음이기에 식사라도 할 요량으로 버스노선이나 전철역 근처를 상세히 일러줬다. 두어 시간 후 버스정류장 어디쯤이라고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정류장을 나가보니 K는 다시 황급히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나에게 알았으니 다시 오겠다는 말을 했다. '무슨 급한 일이 생긴 건가?' 아니면 퇴직하고 이젠 상관없는 사람을 만난다는 자각이 생긴 것일까? 그건 그만이 알 것이다.
삶은 그에게 순간의 희열과 찰나의 슬픔이 전부일까? 어떤 때는 들뜬 목소리로 딸아이와 통화를 했다고 좋아라 했다. 그런 내용이 전부였지만 K와의 통화를 끊을 순 없었다. 느릿하게 발음이 조금은 떨리는 그와의 대화는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다. 전처럼 그의 부모님이 돌봐주는 것도 이제는 연로하실 테니 힘에 부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K는 오늘같이 흐린 날이면 전화를 해대곤 하였다. 아마도 홀로지내니 상념이 많을 것이다. 남들 사는 것처럼 그에게도 가족과의 온전한 생활로 돌아가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