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동몬 May 25. 2023

얼른 출근하고 싶은데 해가 안 뜨네요

막내 기획자의 오기와 고집

이전 이야기


기획에 'ㄱ' 조차 모르는 나는 어떻게든 일을 해내야 했다.


엑셀... 정말 힘들었다.

대학 다닐 때 SUM, average 뭐 이 정도는 해봤지만 꽤나 기술적인 건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에 새로운 브랜드를 런칭하는 사수에게 계속 물었는데 그도 바쁘다 보니 나를 귀찮아했다. (나였어도 그랬을 것 같다) 결국 나는 인터넷을 뒤져 어떻게 하는지 찾아보고 다른 카테고리 기획자에게 가서 묻기도 했다.


처음 기획자가 될 당시, 회사에서는 꽤나 유명한 연예인을 브랜드 모델로 계약했는데 이 모델을 꼭 활용하고 싶었다. 우선 PPT를 만들어 윗선을 설득해보려고 했다. 디자이너를 찾아가 디자인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내가 요구하는 컬러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통역 시절부터 나는 부서 사람들과 사이가 좋았기에 그들은 나에게 흔쾌히 도움을 줬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을 설득할만한 내용과 시각적인 이미지들을 찾는데 집중했다.


처음으로 완성된 기획안을 사수에게 보여줬다.

사수는 막 기획을 시작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런 걸 준비했다며 놀라워했고 좋은 기획안이니 부사장님께 보고를 드려보자고 했다.


똑똑똑


부사장님 실에 사수가 노크를 했고 나와 함께 들어갔다. 내가 만든 자료인 데다 한국어가 가능하니 나는 그 자리에서 자신 있게 브리핑을 했다.


이런 이유로 꼭 이 기획안을 진행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획안을 본 부사장님은 마음에 안 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컬러는 왜 이 따위고 디자인은 왜 이렇나?


사수와 나는 부사장님 사무실을 나왔다.

그런데 나는 왠지 오기가 생겼다. 이 프로젝트를 꼭 진행하고 싶었다. 확신 있었다. 기획안을 좀 더 다듬고 업그레이드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다듬었고 좀 더 설득력 있는 내용으로 업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사수에게 업데이트된 내용을 보여주었고 포기할 줄 알았던 신입 기획자가 다시 해오니 또 한 번 놀랬다. 사수는 바쁜 와중에 나를 위해 다시 부사장님 사무실에 나와 함께 들어갔다.


결과는 반려였다.

두 번째 반려된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는 오기를 넘어 고집이 생겼다.

평소 야근을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팀장님께 먼저 퇴근하시라고 하고(우리는 항상 같이 퇴근했었다) 늦게까지 야근하며 자료를 만들었고 더 많은 사례와 필요한 이유를 뒷받침할 자료들을 모았다. 현재 내가 맡은 카테고리가 겨우 이 정도 비중인데 매출을 높이려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도약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았다. 밤 11시쯤 집에 들어와 잠이 들었는데 못 만든 기획안을 꿈에서까지 작성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 꿈에서 나는 내가 기획한 제품을 안고 자고 있었다.


예전에 부사장님이 한창 일하던 팀장 시절,일하는 것이 즐거워 출근하는 시간이 너무 기다려진다며


일이 너무 하고 싶은데 해가 안 뜨더라.


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딱 그때 내가 그랬다.


눈을 뜨니 새벽 4시.

현실에 돌아와서도 꿈의 연장선이었고 잠이 들지 않았다. 그 기획안을 어떻게 더 업그레이드할지 어떤 내용을 보충해야 할지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 나는 그 기획안에 미쳐있었던 것 같다. 어두컴컴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 길로 씻고 택시를 잡아 타고 회사에 출근했다. 매일 아침에 함께 출근하는 팀장님께는


할 일이 있어 먼저 출근하겠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먼저 출근해 버렸다.


그렇게 두 번이나 반려된 기획안을 업그레이드하여 다시 사수에게 찾아가 보고 하겠다고 했다.


부사장님께 다시 보고 드리고 싶습니다.


(중국어로) 이야기했다.


사수는


이미 두 번이나 부사장님이 반려했는데 그만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요, 저는 꼭 해야겠습니다.


사수는 안될 거라는 확신을 했지만 나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어차피 본인은 떠날 사람이니 너의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우리는 부사장님 사무실에 들어갔고 나는 업데이트된 기획안을 브리핑했다.


브리핑이 끝나고 부사장님께서 입을 열었다.


각 부서 팀장들 다 회의실로 오라그래.


부사장님의 콜로 각 부서장과 팀장들은 회의실로 왔다.

마케팅팀, 디자인팀, 생산팀, 영업팀 등 모든 부서의 팀장들이 있는 앞에서 부사장님은 이야기했다.


동동몬이 기획한 프로젝트를 다음 달 주력상품으로 진행한다.
각 부서는 모든 힘을 이 프로젝트에 쏟아부어라.


지금 생각해 보면 부사장님이 내 기획안을 반려한 건 내가 더 다듬어지길 원하셨던 것 같다.

좋은 기획안이었지만 신입 기획자인 나에게 한 번에 허락하기보다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준비하여 완성도 있는 기획안이 되길 바라셨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할지 지켜보신 것 같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듯했으나 생각지 못 한 걸림돌이 있었다.



다음 이야기


이전 08화 고쳐지지 않는 술버릇 세가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