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순례길. 오세브레이로 - 트리아카스텔라 21.1km
뿌연 안개가 먼저 맞이하는 새벽
이 마을은 왠지 더 스산한 기분이 든다.
이리저리 길을 찾아 마을 밖으로 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고도가 점차 낮아져서 안개도 많이 사라졌다.
불빛으로 비석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후 안심하며 걷기
새벽에 길 잘못 들면 골치 아프다.
아주 먹먹하고 쓸쓸하다고 할까...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한줄기 빛을 비춰주고 싶은 그런 풍경이다.
세상엔 빛이 필요해
앞 뒤로 아무도 없이 나 혼자 걷고 있다.
일찍 일어난 소들
누워있기도, 돌아다니며 풀을 뜯기도, 지나가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도. 다들 제각각이다.
갈래길에서 비석은 아주 큰 도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이 나왔는데 마을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다. 집 한 두채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곳
예쁜 돌길 걸으며 '길 만드시느라 꽤나 힘쓰셨겠다' 생각 중
저 멀리 산 너머 지평선 위로, 주황빛 아지랑이가 살며시 번지고 있다.
몇 분 후, 다시 시작된 오르막길에서 바라본 하늘
마그마가 들끓는 화산 폭발 직전의 컬러 같다.
맑을 때의 일출과 흐릴 때의 일출은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순례길의 또 좋은 점은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아 시시때때로 변하는 수많은 색깔들을 눈에 담을 수 있는 것
쉴 때가 되니 때에 맞춰서 카페가 나왔다.
이 카페에 가려고 했으나
내가 원하는 토르티야가 아직 덜되어서 반대편 카페로 간다.
옵션이 두 개여서 좋다.
왠지 스페인 가정집을 개조한 느낌도 들고
쌀쌀한 아침공기에 난로가 너무 반갑다.
난로 앞으로 가니 따스한 기운이 스멀스멀 전달된다.
이곳은 토르티야도, 빵도 크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반은 싸왔다.
또다시 뚜벅이
여긴 축산농가인 듯하다.
마을에 도착하니 소똥 냄새가 진동을 한다.
바닥에 군데군데 소똥이 널려서 조심하며 걸었다.
개 한 마리를 든든하게 옆에 끼고 일 나가는 아저씨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다.
예쁘게 정돈되었기보단, 사람 사는 냄새나는 시골마을
자전거 순례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순례길에서 만난 한 건축가 친구가 말했다.
이 세상엔 그냥 만들어진 게 없다고.
철조망도 도로연석도 다 의도가 있다고 했다.
오늘 걷다가 송전탑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 안정성과 강도 확보
송전탑은 수십만 볼트의 고압 전선을 수 km 이상 지지해야 한다. 그래서 바닥은 넓고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다리꼴 구조가 가장 안정적이다.
바람, 눈, 비 등 자연재해에 견딜 수 있는 강한 구조가 필요해서 트러스(truss) 형태로 만들어진다.
→ 트러스는 삼각형으로 이루어진 구조라서 하중을 효율적으로 분산시켜 줌
- 철골 구조의 유행
19세기말~20세기 초 철골 구조의 발전 에펠탑(1889)이 등장하면서 철골 트러스 구조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
당시 산업혁명 이후 철재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구조물에 철이 널리 사용되었다. 초창기에는 목재나 콘크리트도 사용되었지만, 결국 가볍고 튼튼한 철골 구조가 주류가 되었다.
시대 상황과 목적을 고려해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도안이 나오고 실현되었다. 일상 속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이 누군가의 상상과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사람 형상의 ‘Land of Giants’ 송전탑-아이슬란드]
더 나아가 창의적 아이디어가 더해진 예술형 송전탑도 등장했다.
우리는 더 발전하길 원하고, 더 아름답길 원한다.
계속 상상하고 창조한다.
그리고 영감은 또 다른 영감을 낳는다.
생각을 하다가 보니 어느새 높은 곳으로 올라왔다.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소들이 보이는데 한 마리는 철창에 갇혀있다. 아파서 그런 건지...
날 불쌍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소
운무에 둘러싸인 정상은,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고요함 속에 홀로 선 느낌을 준다.
잠시 드러난 광명과도 같은 태양빛에 눈이 멀 듯했다.
이때가 해를 제일 가까이서 보지 않았나 싶다.
위에서 아래를 보니 신선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꼭대기에서의 그 여운을 지닌 채 하강하는 중이다.
급경사의 내리막길로 발걸음이 빨라진다.
활짝 핀 이름 모를 노란색 꽃과 수국이 너무 예뻐서 잠깐 멈추기도 하고
안 보이면 아쉬운, 오늘도 빨간 차 발견!
1일 1레드카
마을에 도착했다.
슈퍼 앞 바닥과 한 몸이 된 강아지
이 집 강아지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 동네는 강아지가 많네
표지판 세워진 기둥 꼭대기에 작은 사람이 걷고 있다.
앙증맞아서 웃음이 나온다.
오늘의 알베르게
1등으로 도착했다. 인정 많으신 주인할머니가 날 손녀처럼 챙겨주시며 원하는 침대에서 자라고 하신다.
아늑한 시골 할머니 집에 온 느낌에 오늘 산 탔던 긴장이 스르륵 풀린다.
여기는 식당 겸 거실
배고파서 아까 아침 먹고 남은 것들을 먹고
동네 산책을 나왔다.
옥색 계열의 집이 독특해서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한 분이 창문을 열고 빨래를 하고 계셨다.
마트 탐방
당 떨어져서 오예스 비슷한 과자를 샀다.
오렌지주스
(이 정도면 중독인가..)
씻고 다시 나오니 구름이 이동하며 해가 난다.
머리가 햇볕에 자연건조 되는 중
벤치에서 책 읽고 있는 순례자는 이 순간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교회 앞 묘지들
꽃들이 놓인 곳들이 많다.
사람들이 여기 다 모여있네
언제 흐렸냐는 듯 해가 반짝인다.
옆 알베르게 순례자들이 나와서 빨래도 하고 쉬기도 한다.
조금 쉬다가 저녁 시간이되어 레스토랑에 왔다.
빠에야
돼지고기립과 감자튀김
초콜렛 푸딩
전체적으로 무난 무난한 맛
밥 먹고 나오니 뉘엿뉘엿 해가 졌다.
야외 테이블 아래 전세 낸 고양이들
바닥에 뭐가 있는지 그리 핥아댄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
그리고 그 뒤에 펼쳐진 산을 바라보며 알베르게로 돌아가는 중
따뜻한 한국인 아주머니 순례자들과 한 방이 되어 오늘은 한국말을 실컷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