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시계 풀밭에서 서성거린다. 고개가 땅으로 떨어질 것 같다. 손에는 작은 풀잎들이 몇 개씩 쥐어져 있다. 나도 자연스레 풀밭에 눈길이 머문다. 작은 초록 이파리가 바람결에 파르랑거린다. 앙증맞다. 하얗게 동그만 꽃들을 수도 없이 피워 올렸다. 모두가 세 잎이다. 그중에 네 잎을 찾느라 눈을 반짝인다.
앞날 글짓기 선생님과 통화 중에 붉은 토끼풀 네 잎을 많이 찾아내어 책갈피에 꽂아 놓았다고. 나중에 코팅해서 나누어 줄 것이라고 한다. 세이지 화분을 전해 드릴 겸 카페에서 만나고 서점에 들렀다. 한 권의 책을 마음에 담고, 가방에 넣는다. 돌아오는 길이다. 한 참을 시계 풀잎에다가 눈을 붙박고 걸었다.
어느 순간 둘렀던 스카프가 스르르 내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색감과 디자인이 맘에 들어 아끼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딸에게 톡을 보낸다. 스카프를 잃어버려서 속상하다고. 더 좋은 것으로 사줄게 한다.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 초록으로 된 것 지난번에 사 왔던. 아쉽긴 하네. 다음번에 사갈께. 마음의 빚을 털어 내는 양 후유 한다. 작은 물건이지만 소중하게 다루기를 원하는데, 행운의 클로버를 찾다가 잃어버린 스카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부주의함을 탓해본다.
새 책에다가 네 잎 클로버를 끼워 넣는다. 아홉 개쯤 찾은 것 같다. 아주 작은 것도, 흰 선이 선명하게 들어간 것도 모두 네 잎이다. 세 잎도 몇 개 챙겨 올 걸. 세 잎은 행복이고 네 잎은 행운이라는데. 나에겐 행복도 행운도 모두가 필요하니까. 몽골에서는 네 잎이 많고, 세 잎이 드물어서 행운의 클로버는 세 잎이라고 한다.
동서에게서 ‘방울복랑 금’이라는 다육을 선물 받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시가로 삼십만 원의 가격대를 호가했다. 지금은 너무 많이 기르는 바람에 삼 만원에 거래된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이 너도나도 와서 희귀종 다육들을 사 갔다. 지금은 자기네들도 키우는 방법을 터득했는지 뜸하다는. 코로나로 해서 그나마 오던 발길들이 멈추어지고.
저렴한 다육 금들을 길러 봤는데 약했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조심해야 되는데 성격이 그러지를 못하나 보다. 다른 이들은 키핑 장에서 키운다. 거실과 텐트에서 겨울을 지낸 내 다육이들이 웃자랐다. 사월이 되어 밖에 내놓았더니 빛에 타 들어 볼품이 없다. 마음에서 정을 떼고 있는 중인데 금으로 찾아온 녀석, 다시금 다육을 향한 열정을 끌어 모으지는 않겠지. 오동통한 모양의 생김새가 특이하고 귀엽긴 하다. 오목조목 알록달록 귀티가 흐른다. 마음을 훔쳐간다. 화장을 곱게 하고 변이가 되어 태어난 것들. 우리 집에 온 ‘방울복랑 금’이 엊그제 찾은 네 잎 클로버가 가져다준 첫 번째 행운인가 싶어서 웃어본다.
행운이 자꾸만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마음을 살며시 가다듬는다. 우리는 그런 기대를 원하는 것 아닐까. 새로울 것 없는 현실에서 뭔가 다른 것을 바라보며, 오늘과 내일이 특별하기를 생각하는. 무지개를 꿈꾸어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행운의 네 잎 클로버의 가치가 충분하다.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런 것에 너무 솔깃한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소소한 즐거움 하나 마음에 담지 못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을 텐데. 자유 할 수 있는 나날을 꿈꾼다. 아름다운 것들을 주신 분께서 우리에게 그런 선을 그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 그런 작음 안에 울타리를 두른 것은 아닐까. 자라온 환경과 쏟아져 들어온 정보들과 의식 안에서 만들어진 세계를 탈피 중이다. 작디작은 나를 키우고, 수직선에 머물던 것들을 수평으로 다이얼 맞추듯 할 수는 없는 걸까.
추억의 한 페이지에는 아이들의 팔목에 꽃시계, 꽃반지를 끼워주고 네 잎 클로버를 찾곤 했다. 하얀 시계 풀꽃들을 모으고 모아 머리카락처럼 땋으면 화관이 되었다. 씌워 주면 좋아했는데. 그 영롱한 시간들이 지나자, 풀밭 하나 오롯이 내려다볼 수 있는 시간을 잊었었다. 행운의 네 잎 클로버가 오랜만에 손에 들리어졌다. 먼 뒤안길을 돌아와 다시금 초록 풀밭이다. 오월의 푸름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것, 그것이 행운이고 행복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