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너라서 더 소중해!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수태고지>, 1668.
전화가 왔다. 기다렸던 전화였다. 아내와 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내와 나는 기쁜 환호의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다윤이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아내는 나에게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태몽을 이야기했다. 내가 실망할까 봐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내의 태몽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무리요의 <수태고지>가 생각이 났다.
수태고지는 ‘알리다’는 뜻으로, 예수의 임신을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고한 사건을 말한다. 무리요는 스페인의 바로크 화풍의 화가로서, 스페인의 ‘라파엘로’라 불렸다. 그만큼, 수태고지의 순간을 아름답게 그렸다. 그림 속 여인은 마리아다. 예수의 친모였다. 날개 달린 천사는 마리아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알리고 있다. 머리 위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천사의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는 임신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랍고 기뻤을까? 우리 아내처럼.
아내의 태몽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태몽 속 동물은 고양이였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새끼를 낳는 꿈을 꾼 것이다. 태몽을 검색해 보니, ‘남들에게 인기가 좋고, 단체생활에 잘 적응하는 아이를 잉태할 징조’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일 수 있지만, 다윤이가 우리의 아이로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나 큰 기쁨이었다. 아내가 고양이를 태몽으로 꾼 것은 강이와 산이 덕분일 것이다. 그 녀석들은 자식과 같았고, 유산에 지친 아내를 위로해준 존재들이었다. 덕분에 다윤이가 생긴 것은 아닐까?
종을 떠나, 강이와 산이는 우리 가족이다. 그렇게 본다면 다윤이는 강이와 산이의 동생이라 할 수 있다. <고양이를 안은 줄리 마네> 속 줄리 마네처럼, 강이와 산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태몽 자체가 고양이 아닌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고양이를 안은 줄리 마네>, 1887.
그림은 르누아르가 그렸다. 역시나 ‘행복의 화가’ 다운 그림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기운이 느껴진다. 고양이의 표정에서 모든 것이 드러난다. 만족도가 극에 달할 때의 표정이다. 줄리 마네와 고양이의 관계가 좋았음을 알 수 있다. 다윤이의 미래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다윤이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하루, 하루를 보냈다. 아내와 함께 육아 책을 사서 공부하다 보니, 9개월의 시간이 지나갔다. 잘 때마다 책을 읽어주며 다윤이와 대화를 나누면서 작은 태동 하나하나에 반응했다. 태동이 늘어난다는 것은 곧 만난다는 시그널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태몽은 임신의 시그널이었다. 소소한 시그널이 연결되면 희망은 현실이 된다. 다만, 내가 그 순간들을 놓쳤을 뿐이다. 혹시, 놓치고 있는 중요한 시그널을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