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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플파이 Jul 10. 2022

당나귀가 지켜주는 우리집 ‘바나나’

주방 인테리어에 어울리는 바나나 걸이를 찾는 일은 꽤 재미있었다. 용도에 충실하게 바나나만 지탱할 수 있도록  간단하게 돼 있는 제품도 있고, 원숭이 모형을 이용한 디자인, 바나나 모양을 본딴 디자인 등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고르고 고르다 윗부분을 잎 모양으로 디자인한 야자수 모양의 자작나무 바나나 걸이를 선택했다.


우리는 당나귀 모양의 두루마리 휴지걸이를 쓰고 있는데, 바나나 걸이 옆에 이 휴지걸이를 두고 풍성한 바나나를 걸었더니 마치 당나귀가 바나나를 지키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됐다. 혹시 누가 훔쳐갈까 예의 주시해야 하는 엄청난 바나나라니! 걸어 놓은 바나나가 더 맛있어 보였다.

 

바나나는 대단히 좋아하는 과일은 아니었다. 과일이라는 분류가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다. 내가 생각하는 과일은 한 입 물었을 때 과즙이 가득 느껴져야 한다. 바나나는 이보다 훨씬 더 묵직한 느낌이다.


무엇보다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접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에서 좀 더 부담스러웠는지 모른다. 나와 같은 세대의 여성이라면 바나나 다이어트를 최소한 한 번 들어는 보았을 것이고, 시도해 본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를 대신해 바나나를 2개씩 먹어보기도 하고, 질려서 아침에만 먹었다가, 가끔은 그냥 가방에서 물러버린 바나나를 버려도 보는 과정을 거쳐, 한동안 바나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2개씩 한 묶음으로 파는 싱싱한 바나나를 참 많이도 사면서 지겨워했다.


학교 편의점에서 예쁜 포장으로 팔았던 ‘로즈바나나’에 관심이 가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크기가 작고 귀엽기는 했는데 맛에서 대단한 특색은 못 찾았다.


하지만 바나나는 애증의 관계처럼 한 번 씩 다시 돌아보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배고플 때 좀 건강하게 먹을 만한 것은 없나 뒤적거리기 시작할 때, 그냥 어쩌다 누군가 바나나를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색다른 바나나 요리 레시피를 발견했을 때 등등.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 질리고도 시간이 꽤 흐르면 충분히 다시 잘 먹을 수 있다.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손쉽게 먹을 수 있다는 점도 매력 포인트였다.


내 바나나 취향을 좀 더 잘 알게 된 점도 도움이 됐다. 너무 싱싱해서 연둣빛이 비치는 바나나는 당도가 떨어져 그리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약간 익어서 과육이 부드럽고 달콤한 바나나라야 한다. 잘만 고르면 이런 디저트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니까. 단, 절대 무르면 안된다. 그 완벽한 타이밍에 바나나를 꺾어야 한다.

작년 여름에는 아파트 마트에서 엄청난 바나나를 만났다. 우연히 남은 바나나 중에 한 송이 골라온 것뿐이었는데 그렇게 깊은 단 맛이 나는 바나나는 처음이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족들에게 너무 맛있는 바나나라고 사진을 찍어 보내고 한바탕 난리를 쳤다. 이제 이 바나나로 정착하면 되겠다는 생각에 약간의 설렘까지 느꼈다.


한동안 잘 들어오던 바나나가 어느 날부터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사장님에게 물었다.

“사장님, 혹시 요즘은 그 바나나가 안 들어오나요? 그게 맛있어서요.”

“사실 아침 시장에 가면 그 바나나도 있기는 하거든요. 근데 그게 달기는 한데 빨리 무르더라고요. 저녁이 되면 손님들이 안 사가요. 그래서 들여놓을 수가 없어요.”

먹고 싶은 바나나를 먹자고 사장님의 생계를 위협할 수는 없었다. 단박에 수긍하고는 속으로만 아쉬워하기로 했다.


바나나와 잘 지내보고자 하는 여정은 여러 방법으로 계속됐다. 빵을 워낙 좋아하는데 이제는 혈당도 걱정되고 점심에도 먹었는데 저녁에 또 마음껏 먹자니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방법을 찾던 중 바나나빵 레시피가 눈에 띄었다.


잘 익은 바나나를 으깨고, 날계란도 하나 풀고, 밀가루 대신 아몬드가루를 넣고 잘 섞어 주고는 그대로 전자레인지에 7분 정도 돌리면 완성이다. 좋아하는 하늘빛 도자기 샐러드 보울에 재료를 넣고 시도했다.


정말 될까 싶었는데 구운 바나나의 풍미가 나는 생각보다 괜찮은 빵이 나왔다. 남편도 꽤 맛있다며 몇 번을 떠먹었다.  


실제로 맛있었는데 다시 시도하지 않고 또 빵을 사 먹고 있는 현상은 다소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도 꼭 다시 해보겠다고 다짐하고 있고, 다시 할 때는 윗부분에 바나나들을 잘라서 올리겠다는 계획도 세워 두었다.


미국 교환학생 시절 만난 케이티는 학생 식당에서 바나나 피넛 버터 토스트를 정성스레 만들며 꼭 해서 먹어봐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권했다. 레시피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라 특별하지는 않았다. 식빵을 잘 굽고, 피넛 버터를 먹음직스럽게 한층 바르고 바나나를 썰어 피넛 버터 위에 올려주면 완성이다. 당시에는 끌리지 않아서 사양했는데 정말 맛있게 먹는 케이티를 보고 줄 때 먹을 것을 그랬다고 조용히 후회했다. 그 후에는 잊고 살다가 간간히 궁금했지만 피넛 버터 한 통을 사두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결국 아직까지 못 먹어봤다. 쓰다 보니 맛이 정말 궁금해져서 이제는 피넛 버터 한 통을 들이더라도 꼭 해봐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최고의 바나나는 더 이상 마트에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차선책으로 괜찮은 바나나를 찾았다. 배고플 때 남편도 나도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서 물론 공백기도 있지만 꽤 꾸준히 사 오는 편이다. 덕분에 우리집 바나나 걸이와 바나나를 지키는 당나귀도 ‘근무 중’인 때가 많다. 여름에는 바나나가 상할까봐 냉장고에 넣어두기 때문에 이 광경을 보기 어려워 아쉽기도 하다.


한 번 씩 마음이 멀어지는 바나나지만, 앞으로도 잘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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