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의 각본집을 읽고 인권 관련 메시지를 담아 작성한 해당 에세이를 통해 2020년 서울시립대학교 인권공모전 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글이 저의 짧지만 소중했던 영화마케터 생활을 열어주었다고 봐도 무리가 없겠습니다.
“너는 무슨 사내새끼가 기집애한테 맞고 다니니?”
아주 어릴적, 그러니까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내가 엄마한테 들은 말이었다. 그날은 내가 유치원에서 같은 교실의 여자애와 다투다 얼굴에 생채기가 난 채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과연 우리 엄마는 내 얼굴에 상처가 난 것이 속상하신 것일까 아니면 여자애를 완력으로 압도하지 못하는 아들의 모습이 못마땅하셨던 것일까.
“여자애 밑에 있으면 자존심 안 상하냐?”
초등학교 때 나는 공부를 곧잘 해서 전교권에 들어가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6학년 때 공부를 잘하는 같은 반 여학생이 나보다 항상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엄마께서는 보다 못해 위와 같은 말을 나에게 던지고 말았는데, 듣는 나로서는 당시에도 의아한 마음이었다. ‘아니, 공부랑 성별이랑 도대체 무슨 상관인거지..?’
가부장적 질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은연중에 영향을 미친다. 폭력적이고 성차별적인 문화는 보이지 않지만 각자의 의식 속에 자리 잡아 무의식적인 행동과 언어로 드러나게 된다. 그 영향은 강력해서 성별을 막론하여 퍼져나가고 아랫세대로 전수된다. 또한 문화를 접하고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회의 집단적 경험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1960년생인 우리 엄마는 독재정권 속에서 젊은 시절을 지났기 때문에 폭력적인 문화에 대해 나보다 둔감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라고 생각한다.
이 작품 <벌새>는 담백하게 말하면 1994년을 살아가는 중학생 은희의 모습을 담아낸다. 좀 더 솔직한 표현으로는 뒤틀린 당시의 사회 속에서 불안한 날갯짓으로 나아가는 은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은희의 모습은 그 캐릭터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갖는 이야기가 된다.
극적인 사건이 없이 펼쳐지는 소녀의 일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강자의 약자에 대한 폭력과 가부장적 질서. 즉, 인권감수성이 너무나 낮은 대한민국의 어제다. 영화 초반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날라리를 색출한다며 무기명으로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을 고발하기를 유도하고, 우열반으로 학생들의 등급을 매기는 등의 반인권적 교육을 행한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라는 선생님의 대사는 학교 교육이 다른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고 얼마나 학벌에 목을 매었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온 은희는 가정에서도 가부장적 질서와 남성들에 의한 폭력에 시달린다. 은희의 아버지는 학업 성적에 따라 자식을 차별 대우한다. 정작 자신은 어머니를 두고 춤바람이 난 채 생업에는 시큰둥하다. 그러면서도 떡집에서 자신의 상품을 지적하는 여성에게 자기 가게는 최고급 재료만 쓴다면서 알량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애쓴다. 여성에게 무시 받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남성중심적 사고의 발현이라고 읽혀진다.
아버지의 폭력은 은희의 오빠에게로 대물림된다. 공부도 잘하고 힘이 센 남성이어서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권력구조의 절대적 우위에 있는 오빠는 형제 사이의 작은 폭군이다. 자신의 잔심부름을 거절하는 동생을 흠씬 두들겨 패고 공부를 못하는 누나 역시 무시한다. 가장 막내인 은희는 그 틈바구니에서 애처로운 모습만 보일 뿐이다.
그런 은희에게 한문 학원의 영지선생님이 등장한다. 영지선생님은 아이에게도 존댓말을 쓰고, 상대방을 대할 때 항상 조심하며, 약자를 함부로 동정하지도 않는다. 은희에게 큰 위로가 되어주는 영지선생님은 어쩌면 청소년기에 모두가 한번쯤 만났으면 좋았을 의지할만한 어른의 표상이 아닐까. 성인이 된 내게도 영지선생님은 너무나 큰 위로가 되어주는 캐릭터였다.
“은희야. 너 이제 맞지마. 누가 널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싸워. 알았지?”
영지선생님의 이 한마디를 기점으로 은희는 조금씩 변화한다. 형편없던 전 남자친구와의 인연을 보기좋게 끊어내고, 오빠에게도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 느슨하지만 마음에 깊이 자리잡는 여성의 연대가 개인에서 힘을 발휘하는 순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지선생님은 못다한 이야기를 남긴채 한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열렬히 노동운동을 하다가 소외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 지식인이 산업화 시대의 무자비한 개발논리로 인해 부실하게 지어진 성수대교에서 죽는 일. 은희에게 이 일은 나중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94년에 한국나이로 14살인 은희는 81년에 태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82년생의 김지영과도 또래가 된다. 또한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질서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평범한 시민이 국가적 과실에 의한 재난에 스러져가는 것을 목격한 은희의 경험은 동시대의 수많은 여성들의 경험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는 사상이다.
그렇다면 우리 학교의 재학생 또래들은 어떤 시기를 지나고 있을까. 세월호의 침몰로 인해 무책임한 권력이 국민의 기본권마저 지켜주지 못할 수 있음을 아프게 목격했다.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회에 여전히 만연한 여성혐오가 여성의 안전에도 직접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고, 페미니즘이 대두되는 계기가 되었다. 직접적으로는 대학생 커뮤니티에서도 단톡방 성희롱 사건 등이 발생하며 학내의 여성혐오가 큰 문제로 떠올랐다. 하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을 두고 성별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는 사회적 경험을 하고 있다. 각자의 개인적 경험과 모두가 보편적으로 겪은 사회적 경험을 통해 우리 또래는 어떤 인권감수성을 형성하게 될까.
애처롭게 날갯짓을 하는 은희를 안아주었던 영지선생님이 모두의 삶에 존재할 수는 없다. 영지선생님 개인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높은 인권감수성이 기반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다. 폭력적인 구조적 질서가 허물어지고 모두가 소중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사회. 이정도는 개개인이 어떤 경험을 하였고 어떤 가치관을 가졌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닐까. 가부장적 질서 속에 자라왔고, 사회적 약자에 대해 아직도 만연한 혐오를 목격한 나의 조심스러운 주장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