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그대로, 나는 되도록 친구와 평일에 약속을 잡지 않으려 한다.
왜냐면 아래와 같은 두 가지의 간단하면서도 포괄적인 이유 때문이다.
1) 정시 퇴근이 보장되지 않는다
2) 퇴근 후에도 업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입사하고 완전 초기에는 일도 배워야 하고 오랜만에 평일 내내 일찍 일어나서 장시간을 생산 활동에만 집중하느라 녹초가 되기 때문에 당연히 평일에 퇴근 후 친구와 놀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름 숨 좀 돌릴만 하니까 퇴근 후에 놀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어느날 호기롭게 친한 친구에게 오늘 퇴근하고 어디어디서 보자는 일반적인 저녁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퇴근 후 처음 친구와 약속을 잡은 그날 갑작스런 야근으로 인해 약속 시간에 늦으면서 곧바로 깨닫게 되었다. 아, 영화마케터는 평일에 약속 잡으면 안되겠구나.
물론, 그 후에도 평일에 친구와 약속을 몇 번 잡았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그 친구들은 나와 친함은 물론이고 이해심까지 좋은 녀석들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퇴근이 늦어져서 내가 일하고 있는 곳 인근의 지하철역까지 놀러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직장을 다니는 친구는 약속한 장소와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늦춰 퇴근하기도 했다. 친구라는 존재는 원래도 참 감사하지만 영화마케터가 되고 나서 본의 아니게 감사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해심 많은 친구들 덕분에 퇴근 후 나름대로의 소소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곤 했지만 친구와 만난 자리에서도 영화마케터의 고충은 이어졌다. 영화마케터는 보통 퇴근 후에도 업무 연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포스터나 전단 등의 선재물 진행 일정을 맞추느라 늦게까지 제작사 혹은 디자인사와 연락을 하기도 하고 개봉을 앞두고 선재물 진행이 마무리될 쯤에는 기자들과의 감독/배우 인터뷰 일정 조율이나 영화프로그램 작가에게 epk를 안내하는 등의 연락을 퇴근 후에도 하곤 했다. 우리 대표님은 웬만하면 사원들을 정시에 퇴근시키려고 노력하시지만 퇴근 후 업무 연락은 어쩔 수 없으신 모양이다. 결론은 퇴근 후에도 아주 다양한 곳으로부터 다양한 일로 연락을 받을 일이 생긴다.
이게 퇴근 후 아무 일정이 없다면 그나마 괜찮지만 친구와의 약속이 있는 날 이런 일이 생기면 난감하기 짝이없다. 보통 저녁 약속을 잡으니까 식사를 기다리면서 친구를 앞에 앉혀두고 서로 떠들기에도 모자랄 시간에 날아오는 업무 연락을 쳐내느라 분주하다. 앞에 있는 친구는 덤덤한 양 내색을 않는 배려를 해주지만 나 스스로도 같이 놀자고 해놓고 일을 놓지 못하고 있으니 너무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주문한 음식이 나와도 먹는 둥 마는 둥 업무 상대의 다음 연락을 기다리며 핸드폰에만 신경을 두다보니 친구와 온전한 시간을 보내기가 어려웠다. 한 친구는 그런 나를 지켜보면서 "이야 영화마케터가 빡세기는 하네요(나보다 동생이었다)"라며 감탄했다(혹은 혀를 내둘렀다). 나는 웃기만 할 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영화마케터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이런 일을 예상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다. 잦은 야근도 불사하면서 열정을 불태우고자 마음먹었더랬다. 하지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더구나 아주 작고 귀여운 봉급을 받으면서 일과 후의 삶을 온전히 보장 받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니 더 적응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그리고 적어도 친한 친구 앞에서는 퇴근 후에도 일에 허덕이는 모습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퇴근 후 친구와 안국역에서 만나서 핫플을 뿌수기로 한 어느 금요일이었다. 그날은 외근 후 칼퇴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약속을 잡았다. 예상대로 깔끔하게 칼퇴에 성공했고 친구와 반가운 인사를 주고 받은 끝에 저녁을 먹으러 향했다. 하지만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부터 음식을 먹는 도중에도 끊이지 않고 업무 연락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영화프로그램 작가와 기자, 배우, 우리 회사 대표님 등등 다양한 곳으로부터 연락을 주고 받게 되는 머리 터지는 상황에 놓였다. 아니 다들 퇴근하고 좀 쉬시라구요ㅠㅠ
그렇게 업무의 연장을 쳐내면서 저녁을 먹고 카페로 이동했다. 황금같은 일과 후 시간을 이렇게 날릴 수 없다며 초초함과 분노 섞인 감정이 차오른 나는 결국 카페에서는 휴대폰을 끄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연락을 끊고 친구와의 시간을 보내는 데 집중하니 그래도 좀 숨통이 트였다. 친구와 헤어지고 휴대폰을 다시 켰을 때 부재 중의 나를 찾는 연락이 쏟아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추가로 온 연락은 없었다(사실 어느 정도 일을 처리하고 휴대폰을 껐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예 업무를 나몰라라 할 정도로 배짱이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영화마케터 한 사람이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영화를 온전히 담당하다 보니 책임도 많이 부여되고 자연스레 처리할 업무가 이것저것 많아진다. 그래서 9 to 6 안에(회사마다 출근 시간이 조금씩 다르지만) 업무가 마무리 되지 않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퇴근 후에는 엄연히 자유로운 개인 시간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는 법이다. 워라밸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이제 퇴근 후 자꾸 나를 찾는 연락이 지속되면 휴대폰을 꺼버릴 예정이다. 나중에 상대방이 왜 잠수를 탔냐고 묻는다면 영화애호가 다운 좋은 핑계를 댈 테다.
"제가 영화 보러 극장에 있느라 전화를 꺼뒀네요! 혹시 무슨 일이실까요? :)"
P.S. 결국 위의 핑계를 대고 잠수를 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