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부처님[E.5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2)]

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룸비니 편

by 노루

11, 포카라행 버스 티켓


마야데비 사원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몇 장을 찍었다, 이제 룸비니에서 해야 할 일은 다 했다. 남은 일은 필요한 물품과, 포가랑행 버스 티켓과 밀린 일기만 쓰면 됐다.


묶어 놓은 자전거를 찾아 시내로 향했다. 어젯밤에 샤오미 밧데리를 붙들고 왔던 그 길인 것 같았다. 10분 정도 비포장도로를 달려 어젯 밤에 중국인 부부와 헤어졌던 거리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포카라행 버스를 끊었다. 도로를 따라 몇 개의 판매소가 있었지만, 이른 아침여여서 그런지 문 연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같이 아침을 먹은 한국분 께서는 700루피 정도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셨는데, 이곳은 1000루피를 불렀다. 이상한 것이, 마음도 편하고, 배도 부르니 별로 깎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물하나 10루피 비싼 거에는 그렇게 투덜대다가도 이런 것에는 별로 깎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다.


버스표를 사고, 잡화점으로 가서 풀과, 수건과 공책을 샀다. 선반 위에 있는 물통을 찾으려다, 뒷걸음에 계란 하나를 부셔서 15루피를 물어주었다.


13. 국제사원구역


대성석가사로 돌아가는 길에 국제사원구역을 둘러보았다. 국제사원구역이 룸비니에 있다고 듣긴 했지만 감이 오지 않았었다. 이 구역은 마야데비사원을 끝으로 세계 각 국의 불교 사원들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대성석가사에서 받은 지도를 기준으로 절을 찾아 다녔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사원 양식의 다양성이었다. 각각의 사원들은 제각기 그 모양과 양식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나라 절은 우리나라 같았고, 베트남 절은 용맹한 느낌이 강했다. 중국절은 규모면에서 압도를 했다.


스위스, 케나다, 독일등의 서양 사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동양의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또 관리하시는 분들도 보통 현지 스님인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아마 동양의 한 나라의 불교에 영향을 받고 자신의 나라에서 재단을 만들어 사원을 지은 것으로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싱가포르 사원의 파란색 단청이 보기 좋았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너무 규모 적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것보다, 이 이쁘고 멋있는 절에서 다양한 나라의 스님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관람을 마치고, 대성석가사로 돌아와 자전거를 반납했다. 이제 밀린 일기를 써야했다.



베트남 사원이다. 느낌이 용맹무쌍하다. 뭔가 전투적인 분위기였다.
태국의 사원이다. 파란하늘 위에 하얀색이 이쁘다.






설명에 따르면 여기도 베트남 절이라는..? 두 개인가?




싱가포르의 사원이다. 개인적으로 진한 파란색 단청이 정말 아름다웠다.





독일의 사원이다. 독일식 건물로 지었을까 상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캐나다의 사원이다. 캐나다라는 생각이 드니까, 캐나다 단풍 색깔이 보였다









중국 사원이다. 규모면으로 압도적이었다.




12. 중국인 부부와 밴댕이소갈딱지


필요한 것들을 다 사고, 근처에서 짜이 한잔을 시키고 기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앉은 자리를 정면으로 가게 밖의 100미터쯤에서 어제 만난 중국부부를 포착했다. 하지만 모른척하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지금, 대성석가사에서 일기를 쓰고 있는 나를, 아저씨가 발견하시고 인사를 하러오셨다. 반갑게 손을 흔드시고, 아저씨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셨다. 아주머니가 어제 나를 밤에 혼자 택시에 태워 보내셨다며 아저씨를 달달 볶으셨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죄송해졌다. 아침에 인사를 드렸으면 덜 걱정하셨을 텐데 말이다. 인사를 하고 와츠엡 아이디를 교환했다.


사실 어제 내가 700루피를 낸 것이 심통이었다. 2000루피를 3으로 나누면 667루피였는데, 나는 내심 내가 650루피나 600루피만 내길 기대 했었다. 근데 나보고 700루피를 내라고 하시니, 그 조그만 차이에 빈정이 상했었다. 에휴..나는 밴댕이소갈딱지다.


14. 자아 찾기가 중요해


한 아저씨가 다가오셨다, 나도 인사를 드리고 어디로 이동하시는 지 여쭤보았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나에게 견과류 한 묶음을 던져 주시고 가셨다. 여행 후 남은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정말 감사한 음식이었다. 108배를 하다가 나를 보셨다면서, “자아 찾기가 중요하지!”라며 말을 남기시고 유유히 길을 떠나셨다.


아저씨 말을 듣고, “흠 자아가 어디 있을까?” 생각했다. 유명한 스님들이나, 책에서는 “내가 없다”고 말하시던데...정말로 이렇게 일기를 쓰는 나는 없을까? 아니면 아저씨의 말대로, 사람들이 말하는 “자아”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언어를 배우지 못한 아기에게는 확실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 아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언어(주어, 술어, 목적어, 동사 등)에 의해 구조화 되어 있지 않았으니 말이다. 보는 대상과 보는 사람 자체를 구분할 수 없으니 “내가 본다.라는 생각 조착 있을 수 없는 것 아닐까?


뇌가 겪는 착시현상처럼, 알고 있는 것은 보는 것에 영향을 준다. 아이는 언어라는 것을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주어와 술어로 나와 남을 구분하고, 단어를 배우면서 대상들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언어의 발달로 구분이 세밀해질수록, “자아”를 표현하는 “개성”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언어라는 연필은 안팎을 점차 벼루어져 날카로운 칼이된다.


나도 이 틀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다. 이렇게 테두리를 진하게 그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라도 나를 표현하는 어떤 것(학위, 경험, 돈, 여행, 꿈)이 없으면 나를 영영 잃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구분되지 못하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이렇게 보면, 내가 힘들었던 것도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내가 언어라는 펜으로 그린 내가 강해질수록, 그곳엔 피멍이 들고 나중에 딱지가 생겼다.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 만든 상처들이기 때문에 맞는 것을 즐겼던 것처럼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아저씨의 한마디가 저어 멀리 까지 나를 보낸 것 같다. 아저씨의 의도 였을까? 아몬드는 다 먹어버리겠지만, 아저씨의 말은 계속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직 뭔가 찝찝하다. 이미 배워버린 한국어를 다시 까먹을 수도 없는데, 이건 그럼 불치병인가?


15. 흐름 속에서


강물과, 바람과 같은 흐름을 읽기 위해서는 흐름 밖에서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먼저 흐름 속에 있음을, 본인 자체가 흐름의 일부인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흐름으로 표현되는 변화라는 것 자체가 다 이런 특징을 보이지 않을까? 자전거 페달을 밟어 만든 바람을 맞으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의 말처럼, “자아”라는 것이 있다면 자아는 흐름이 아닐 것이다. 자아가 흐름이라면, 자아는 테두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는 변화하지 않는 것이어야만 확실한 테두리를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말로 만드는 경계선도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선의 확장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선은 그을수록 행복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생활 속에서는, 나에게 더욱 진하게 나를 그리기를 강요하지만 내가 선명해질수록 괴로움은 커져간다. 이것은 모순이다. 경계선의 존재가 확실하다면, 나의 개성을 키우는 강화의 과정 역시 행복해야만 한다.


자아가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것이라는 전제에서, 자아는 흐름이 아니여도 모순되고, 흐름이여도 모순이 된다. 하지만 분명히, 이 글 속의 나도, 실생활 속에서의 나도 분명히 “나”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렇다면 전제를 바꿔야한다. 자아 독립적이지 않고, 계속 바뀌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극적으로 바뀐다. 내가 힘든 것도 모순이 아니라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끊임 없이 바뀌고 의존적인 것을 독립적이고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는 것 사이의 괴리가 내가 느끼는 부작용인 것이다.


14. 고마워? 뭐가?


일기를 쓰면서 앉아 있는 나에게 한 친구가 다가왔다. 내 앞에 앉아 있던 중국인 커플 중 하나였는데, 리오양이 내 앞에 와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냈다. 이것저것 물어보기에 내 일가장을 보여주었다.


처음에 그들을 보았을 때, 일본인 인줄 알아서, 중국인인 줄 몰랐다고 하니 나에게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동양인들은 대충 구분이 가능했다.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동남아인. 내가 이렇게 구분을 하듯, 관광업을 종사하시는 분들은 금방 내가 어디서 온지 파악을 하셨다. 그들이 내가 한국인 인 것을 알 때는 신기했지만 다짜고짜 고니찌와와 니하오를 외치는 분들에게는 별로 마음이 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리오양은 잘못 알아본 나에게 감사하다고 하니,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나라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자신의 나라를 부끄러워하려나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 한국 사람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이 중국 사람임을 부끄럽게 한 것일까?


라오양은 룸비니에 머문 지는 4일 정도 되었다는 것 같았다. 이제 육로로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14. 어쩌다보니


저녁 공양을 하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글이 쓰여 있는 옷을 보고 인사를 드렸더니, 다짜고짜 아저씨는 하소연을 시작하셨다.


9월 3일 쯤 여행을 시작하셨는데, 아는 지인 분을 통해서, 네팔을 관광하신다고 하셨다. 여행을 도와주시는 분이 한국에서 일하시는 직장동료의 가족이라 안심하고 왔지만 이게 영 이상한단다.


일단, 그 직장동료의 가족이 네팔 분이신데, 그 네팔 분의 가족들과 같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리고 돈이 필요할 때마다, 달러를 얼마씩 달라고 요구하시는데, 얼마에 환전을 했는지, 그 돈을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셨다.


밥 때가 되면 밥을 줘야 하는데, 9시 10시가 되어야 밥을 주었고, 또 어린 여자 애들과 같은 방의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게 했다고도 하셨다. 돈도 약 한 달간 3000달러 이상을 주셨다고 하니, 정황상 아저씨 돈으로 모든 가족이 여행을 다니는 것 같았다. 또 금목걸이와 금반지도 분실을 이유로 맡겨 놓으셨다고...


아저씨도 여행이 하도 불편하고 이상하니, 따지고 들었더니 오히려 면박만 받고 감정만 상했다고 하셨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싶어, 전에 와본 적이 있는 룸비니로 몰래 도망쳐서 대성석가사에 도착하셨다고 한다. 오후에도 그 가족들이 이곳에 와서 아저씨를 찾으셨는데 조용히 숨어서 그분들이 떠나길 기다렸다가 이제 나오시는 길이셨다고 했다.


15. 상황정리


상황을 정리해보니, 바로 카트만두로 가서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맞아 보였다. 여윳돈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셔서, 대사관에 연락하여 바로 한국으로 가시는 것을 추천 드렸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대성석가서 스님께 말씀드리니, 그냥 여기에서 비행기 타기 전까지 머물고 있다고 이곳에서 카트만두로 가는 여행자와 같이 움직일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겠다고도 하셨다.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수긍하시는 듯 했으나, 그래도 내일 아침 나랑 같이 버스정류장에 나가 보겠다고 하신다. 혼자라도 다시 길을 떠나시려는 모양이다. 그런데 같이 가기 싫어서 그냥 쉬시라고, 저는 새벽에 나가야 하니 그냥 쉬시라고 하셔도 굳이 따라 가신다고 우기셨다.


16. 너무하셔


나도 처음에는 측은한 마음에 열심히 듣고, 상황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씀드렸지만 듣지는 않으셨다. 그냥 이야기가 하고 싶으셨는지, 자기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고, 얼마를 벌고, 네팔에 대해서는 얼마나 잘 알고 있고, 대전에 누구 아는 사람이 있고, 절에서는 얼마나 생활을 하셨고, 자기가 무슨 책을 읽었고, 누구 스님을 알고 있고 등등 묻지도 않은 말을 쉬지도 않고 계속 뽑아내셨다. 지겨웠다. 방도 같이 쓰게 되었는데, 그런 종류의 이야기를 자기 전까지 계속하셨다. 외로우셨으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듣는 내내 내 귀는 괴로웠다.


스스로 고민을 잘 들어 주는 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장시간 들으니 정말 짜증이 났었다. 그리고 방에 들어오시자 이상한 냄새로 방을 감옥으로 만들었다. 12시까지 쉬지 않고 얘기하시다 잠에 드셨지만 나는 코와 귀만 마비되고 잠은 푹 자지 못했다. 결국에는 새벽 3시 정도에 잠에서 깼다. 더 이상 못잘 것 같아, 밖으러 나가려 했으나, 소리 때문에 그 아저씨를 깨우고 말았다. 일어나자마자, 어제 이야기가 끊긴 곳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시는데 나는 카세트인 줄 알았다. 바로 질려버렸다.


서둘러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곧 나를 따라 나오셨다. 아직 새벽예불까지 시간이 있으니 더 쉬라고 하셔도 기어코 따라 나오셨다. 혼자 있기 불안하셔서 그런 것이라 이해는 됐지만, 이해만 되지 공감은 되지 않았다.


17. 우리 이제 그만 만나

일기를 쓰고, 대성석가사에서 마지막 예불을 드렸다. 급히 공양을 먹고 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버스정류장 가는 길은 쉬웠는데 2번 째 가는 길이라 정확히 외우지는 못했었다. 시간이 간당간당해서 발걸음을 더욱 빨리 굴렸다. 아저씨는 내 뒤를 따라오시는데 자꾸 이길이 아닌 것 같다며 뭐라고 하셨다. ‘그러면 혼자 오시지 왜 괜히 나한테 뭐라고 하시는지’라고 생각을 하며 짜증이 났다.


다행히 제대로 길을 찾아 가고 있었다. 나는 이미 마음이 상해 더 빨리 걸어서 저만치 앞으로 갔다. 아저씨는 화장실에 간다며 나에게 먼저 가라고 하셨다. 직진 후에 우회전만 하시면 된다고 말씀드린 뒤, 나는 달려서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가 연착되어서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아저씨도 오셨다.


아저씨가 카트만두로 가는 표를 알아봐 달라고 하셔서, 알려드린 뒤,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아저씨는 아쉬운 듯 보였지만, 나는 말로만 아쉬웠지 개운했다. 룸비니에서 머문 첫 하루는 정말 편했지만, 아저씨와 같은 방을 쓰며 하루를 더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나서야, 아저씨가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랄 수 있었다.

-E6.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포카라]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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