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
문해교실 책상 위로 햇살이 스며든다.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던 은백자님이 조용히 입을 여신다.
"오 여사, 잘 있는지 모르겠네."
어르신들의 눈길이 은백자님에게로 모아진다.
"그러게. 연락 한 번 없네."
"원래 그 사람 전화 잘 안 받았잖아."
"무소식이 희소식이야. 언젠간 돌아오겠지."
어르신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아련한 정이 묻어난다.
첫 만남의 시간, 어르신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떠들썩했다.
그러나 오여사님은 눈을 내리깔고 책만 들여다보았다. 서로 인사를 나눌 때도 간단히 이름만 말했다.
6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어깨선이 곧았고, 눈매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았고, 웬만한 일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들 처음에는 다가서기 어려워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르신들은 오여사님을 이해했다. 다소간 차가워 보이는 표정과 말 없음은 세상을 굳게 견디며 살아오느라 다져진 모습이었다. 그 모습 중에도 틈틈이 어르신들을 챙기는 따사로움이 보이곤 했다.
어느 날부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르신들은 그분을 '오여사'라고 불렀다.
오여사님은 주로 은백자님 하고 대화를 나눴다. 서글서글한 은백자님은 말끝마다 맞장구를 쳐주시곤 했다.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 자매처럼 정다워 보였다. 거의 말이 없는 오여사님은 짝꿍인 은백자님에게만은 짧지만 정확한 말로 속마음을 건네곤 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저녁, 약간 술에 젖은 목소리로 오여사님은 내게 전화를 했다. 시간이 괜찮냐고 물으시곤 그동안 지내온 이야기를 솔직히 꺼내 놓으셨다. 내게는 한 번 털어놓고 싶으셨단다.
차가운 외모와는 달리, 인생의 굴곡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부드러움과 담담함이 말속에 담겨 있었다.
그러고는 다음날 수업 시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수업을 들었다.
그 모습은 문해교실을 마지막으로 나갈 때까지 이어졌다.
오여사님은 손솜씨가 정말 좋았다.
김밥을 싸 오는 날이면 교실 전체가 들썩였고, 다들 “오늘은 잔칫날이네” 하시며 기대에 차 있었다. 어느 유명한 김밥집도 흉내 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맛이었다. 사 먹는 김밥과는 다르게 재료 하나하나가 정갈하고 색색 모양이 참 예뻤다.
예전에 분식집을 했는데, 사정이 생겨 그만두셨다고 했다. 앞으로의 꿈은 다시 분식집을 하는 거라고 했다.
“이런 김밥 우리만 먹기 정말 아깝다. 가끔 만들어서 팔아.”
어르신들이 제안하면 빙긋 웃곤 했다.
"장사하려면 여길 왜 갖고 와요. 어르신들 드시는 게 좋아서 해 오지."
어르신들은 정성껏 싸 온 김밥을 아끼며 드셨다.
"나중에 분식집 내면 우리가 최고 단골이 될 거야."
"꼭 연락해, 어디든 찾아갈 거니까."
“오여사 김밥은 찐 사랑이고 정성이야.”
고운정님이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만드셨다.
오여사님은 가끔 본인의 옷도 스스로 만들어 입었다.
날씬한 몸에 어울리는 우아한 색감과 디자인이 독특했다. 눈썰미가 대단했다.
"이런 걸 어떻게 만든대. 비슷한 걸 사려고 돌아다녀도 없더라."
“있는 천으로 대충 만든 거예요.”
거친 손과는 다른 고운 자태를 보면 그분의 삶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단아한 모습을 보면 왠지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그런 오여사님이 갑자기 수업에 못 나오게 되었다며 우울해하셨다.
친정어머니가 낙상하셔서 돌봐야 하고, 그 뒤에는 경제적으로 자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칠십 넘으면 다시 올게요. 그땐 좀 안정이 되겠지요.”
"꼭 돌아와야 해. 기다릴게."
모두 서운해했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는 자세히 묻지 않는 것이 어르신들의 상대방 존중 방법이다.
은백자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 사람은 글씨 흘려 쓰는 게 싫다고 매번 고쳐 썼는데... 야속한 사람, 전화해도 안 받아요."
서운함이 얼굴 가득하시다.
"자기가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인 것 같으니 언젠가 오겠지."
"차가워 보이고 말은 잘 안 했어도 손끝도 마음도 깊고 고운 사람이었어."
그리움이 묻어 있는 말들이다.
어르신들은 ‘돌아오겠지’라며 편히 말씀하셔도, 마음속으로는 정말 돌아오길 기다리신다.
오여사님은 칠십을 넘기고, 약속했던 것처럼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실까.
그분이 앉았던 자리에 햇살이 곱게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