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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두비두밥 Oct 18. 2023

9. 교수님의 너그러움

2023.10.17

 얼마 전에 내 세상이 무너졌다. 인쇄소에서 19만 원이 넘는 돈을 긁고 나온 후였다. 교수님께 영수증을 취합해 송부하니 카톡과 전화가 돌아왔다. 무너진 세상의 잔해에 내 통장 잔고도 깔려서 아파하는 중이었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이틀 후 있을 답사에 소책자 35부가 필요했다. 교수님은 내게 스캔과 파일 제작과 인쇄를 맡기셨고 영수증을 보내면 비용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지시사항은 굉장히 명료했다. B5 사이즈, 논문에 사용되는 미색 용지로 출력해 은색 매직클립을 끼울 것. 스캔하려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의 페이지까지 모두 알아낸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어떤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 책에 해 놓은 낙서를 직접 지워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는 사실이 조금 자랑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인쇄소에서 작전 지휘를 하는 장군처럼 용감하게 출력을 맡겼다. 흑백으로 할 거냐는 물음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컬러로 해주세요! 사진이 들어가 있어서요."


 그렇게 19만 2500원이 나왔다. 카드로 결제하니 통장이 비명을 질렀다. 나는 조금 겁에 질렸지만 어느 영화에서처럼 '알 이즈 웰(All is well)'을 되뇌었다. 샘플 하나를 교수님의 우편함에 살포시 놓았다. 무게만 7킬로가 넘는 나머지 책자들을 낑낑대며 집까지 옮겼다.


 대학원에서 과학사 과정을 밟고 박사를 수료한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엄청난 비웃음이 돌아왔다. 누가 답사 책자를 컬러로 뽑아? 직접 가서 건물을 눈으로 볼 건데? 눈물까지 흘리며 웃은 아빠는 잠들기 전까지 나를 놀렸다. 상황의 심각성이 서서히 피부에 와닿았다.


"똥멍청이"


 교수님의 지시사항을 토씨 하나 안 틀리게 적어놓은 메모를 열심히 살폈다. 어디에도 흑백이나 컬러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았다. 따지고 보니 교수님께서 19만 원을 경비 처리 하시는 일도 말이 안 되었다. 걱정으로 밤에 잠을 잘 못 잘 것만 같았다. 


 7킬로치 책자를 들고 집까지 온 여파로 잠은 잘 잤다. 오늘은 또 오늘의 골칫거리가 생긴다고 했다. 영수증과 금액을 정리한 엑셀 파일을 만들어야 했다. 교수님께 보내드리니 확인했다고, 보내주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한시름 던 기분이었다.


 그러나 안심하긴 일렀다. 아빠에게 별일 없다고 자랑하기 무섭게 카톡이 하나 더 왔다. 혹시 컬러로 했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답장이 돌아왔다.


'흑백으로 하라는 걸 내가 말을 안 했구나'


 카톡창에서 후광이 보이는 착각이 일었다. 교수님은 실수를 봐주셨고 다음번에는 먼저 물어보라고 덧붙였다. 나는 이제 안도해도 되는지 눈치를 살피다가 조심스레 긴장을 풀었다.


 그러나 오후에 교수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인쇄소에다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모양이었다. 2만 원을 할인받아 영수증을 다시 뽑아오면 되었다.


 사건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나는 교훈을 얻었다. 메모를 너무 믿으면 안 되었다.


 메모는 일을 돕는 부가적인 것이지 절대로 매뉴얼이나 가이드라인이 아니었다. 19만 원짜리 교훈치 고는 당연한 말 같겠지만 내게는 소중했다.


 그날 이후로 잔고가 아파하며 이틀 뒤 경비 처리 후 입금될 돈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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