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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두비두밥 Oct 18. 2023

10. 교수님의 실망

2022.3.11~

 지도교수님이 지도교수님이 될 줄 모르던 때가 있었다. 교수님도 테니스 라켓을 매고 새까맣게 탄 저 학생이 옆 건물 체대생인지 우리 단과대생인지 헷갈리셨을 것이다. 


 당시의 나는 1학년 2학기를 맞아 어떻게 이번 한 학기도 알차게 놀지 궁리 중이었다. 교수님의 전공 수업은 흥미롭고 재밌었다. 애석하게도 당시 전염병이 번지는 중이었기에 줌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수업도 듣고 과제도 열심히 해갔다. 다만 강의 내용을 전부 잊어버렸을 뿐이다. 드문드문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불행하게도 교수님이 바라는 요점과 좀 달랐다.


어쩔 수 없는 슬픔이었다.


 내가 학부연구생을 하며 교수님은 여러 번 실망하셨다. 함께 수업에 나왔던 곳으로 답사를 나간 날이었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여기 수업에 나왔던 곳인데."


(어른거리는 아지랑이 한 가닥을 붙잡는 심정으로) "네, 맞습니다. 기억납니다."


(학부연구생까지 할 정도로 열정적인 학생이 할 말을 기대하시며) "그럼 00이가 설명해 보면 되겠네."


(도망가는 기억의 아지랑이를 필사적으로 쫓아간다) "아...정확한 디테일이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나는 머리를 굴리고 굴려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다.


"교수님께서 전공하신 분야인데 제가 어떻게 교수님 앞에서 설명을 드려요."


 분명 교수님은 그때 비웃으셨다. 그리고 실망하셨다. 하지만 포기하진 않으셨다. 


 한 번은 수업 때 교수님께서 언급하셨던 다른 건물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나는 수업에 나왔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이런 망언을 지껄였다.


"그 건축물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서, 답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래?"


 사전 조사를 했다는 뿌듯함에 취해 떨떠름한 교수님의 표정을 잘 살피지 못했다. 친구에게 잔뜩 혼나고 나서야 잘못을 깨달았다. 


 결국 나는 교수님의 1학년 2학기 전공 수업의 필기를 친구에게서 받았다. 내 필기는 컴퓨터 폴더에서 행방불명된 지 오래였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수업 내용을 숙지해 가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다른 때는 다른 전공 수업의 결과물을 보여 달라고 하시길래 패널을 보여드렸다. 영 시원찮은 최종 과제를 꼼꼼히 살펴보시고 교수님은 결론을 내렸다.


"설계는 잘하고 못하고 가 중요한 게 아니란다."


 좋은 말씀이었다. 내 설계 과제를 본 후 하신 말씀이어서 마음이 아팠을 뿐이다.


 나는 여전히 그리 성실한 학부연구생은 아니다. 인쇄소 19만 원 사건으로 교수님의 속을 썩이고 칠락 팔락 나돌아 다니길 좋아하지만 103개의 메모를 보니 깨닫는 바가 있었다.


 메모는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다. 학부연구생 활동이 끝나도, 어쩌면 대학원생이 되거나 취업한 후에도 메모는 쌓일 것이다. 내게 메모는 단지 일상을 편리하게 살아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나의 크고 작은 삶의 단편이자 언젠가 울고 웃었던 기록이다. 내 메모장에는 인자하신 교수님이 살고 있고 짓궂은 아빠와 유쾌한 친구와 '할 일'이라는 이름의 귀찮은 녀석도 복작복작 살고 있다.


 나 또한 메모장에 산다. 작가로 먹고살기 위해,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내가 유일하게 혼자 간직하려고 쓰는 글이 메모이다. 결국 메모 또한 세상에 내보이게 되었지만 메모장은 내 믿음직한 인생의 동반자로 항상 있을 것이다.


 글을 시작했던 사흘 전에 1,699개였던 메모는 이제 1,703개가 되었다. 내 메모장에 자리를 잡은 모든 이들이 보금자리를 만족스러워했으면 좋겠다. 


 할 일과 살 것의 목록들 사이에서 발 뻗고 쉴 수 있기를, 무엇보다 재미난 일이 생기면 메모하길 잊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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