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환자가 되어 있었다.
진료의뢰서를 발급받았다.
내가 근무하는 이곳은 대학병원이기 때문에 진료의뢰서 없이는 진료가 불가하다. 동네 내과 의사는 3차 병원 진료를 위한 진료 의뢰서를 발급해 주었다. 대장 내시경 검사 결과지와 의뢰서를 가방에 넣고 병원으로 출근했다.
(출간 준비중입니다.)
정상적인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빠른 진료를 원했다. 진료예약센터에서는 가장 빠른 진료는 한 달 뒤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다음 달에는 파견을 가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번 달 안에 진료를 받아야 했다. 인턴식 찬스를 썼다. 대학 병원 근무 4개월 차 인턴은 알고 있다. 밀어붙이면 안 되는 것 없는 곳. 이곳 대학병원이었다. 소화기내과 상담 간호사에게 본원에서 일하는 인턴임을 밝히고 사정을 하고서야 예약을 앞당길 수 있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더위를 느끼지 못한 여름이었다. 서늘한 새벽이면 출근하고, 태양이 뜨거운 한낮엔 차가운 공기 가득한 병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에어컨이 시원하게 돌아가는 소화기내과 5번 방 앞. 진료실 앞 대기 의자에 내가 앉을자리는 없었다. 세상에 아픈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다. 근무 중이었던 나는 파란 스크럽 복 위에 하얀 가운을 입고 섰다. 한 손에는 동네 내과에서 받은 검사 결과지를 쥐고 기다렸다. 나를 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와 같은 처지의 환자들이다. 그들 눈에는 의사 가운을 입은 나는 업무 때문에 교수님 만나러 온 그저 평범한 의사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가운만 입었을 뿐 나는 당신들과 같은 환자일 뿐인데.
순서가 되어 이름이 불렸다. 흰 가운을 입고 하얀 가운을 입은 교수님을 마주하였다. 이미 조직 검사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니길 바라기도 했다. 교수님은 말없이 검사를 살펴보고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직접 한번 다시 봤으면 좋겠는데요, 바로 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제가 지금 인턴 근무 중이라, (응급 콜이 올지 모르니) 낮 시간에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서요."
"그래도 S자 결장 검사는 금방이면 되니깐, 바로 검사하고 약 쓸게요."
인턴에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며 예의를 차리는 교수님이었다. 다음날로 검사예약을 잡았다. 10분 정도의 짧은 검사였지만, 검사하는 내내 병동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오지 않는지 조마조마했다. 검사가 끝나자마자 교수님은 바로 약을 사용하자고 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 병이었다. 스스로 상태를 확인해보기 위해 진료기록을 열어보았다.
definitely ulcerative colitis, severe
확실한 궤양성 대장염, 중증
7월의 어느 날. 대학병원 진료실 한편에서 의사 가운을 입고 산정특례 신청서를 작성했다. 희귀 중증 난치질환이라는 안내문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뭘 잘 못 한 거지. 내가 왜 환자가 되어있지 나는 내 앞에 주어진 삶을 매 순간 열심히 살았던 것뿐이었는데...'
의사가 되려고 이곳에 온 것인지, 환자가 되려 한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이룬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인턴 생활에 정신이 팔려 3월 말에야 정식으로 발급받은 의사 면허증. 나의 오랜 꿈. 이제 막 의사가 되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의사로서의 경력과 내 질병의 병력의 햇수는 동일하다. 어딜 가든 내 직업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그 병은 나를 졸졸 뒤 쫓아다니는 꼬리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