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의사가 진료실에서는 못했던 말(1)
요즘은 유튜브로 모든 세상의 정보를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나 역시도 유튜브의 세상 속에서 사는 시간이 늘었다. 나를 이렇게 유튜브 중독으로 빠뜨릴 수 있는 가장 악랄한 기능 중에 하나는 바로 알고리즘 추천 덕분인데 정말 신기하게도 나의 취향을 딱 저격하는 영상을 보여준다. 오늘 본 영상 중에 하나는 마이클 부블레라는 미국 가수의 2015년 내한 공연에서 마이클이 관객을 무대로 불러 노래에 맞춰 춤을 추게 하는 영상이었다. 관객석에서도 어찌나 호응을 잘하고 춤을 잘 췄는지 마이클이 안 불러낼 수 없었다고 하며 불러내 즉석에서 콜라보를 하는데 너무나 맛깔 나게 춤을 추면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영상을 보면 나는 꼭 밑에 댓글을 보곤 하는데 매년 그의 영상을 보면서 댓글이 업데이트 되고 있었고 다들 나와 비슷하게 그의 춤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게 되고 알 수 없는 힘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영상의 주인공의 이름은 ‘지광’이고 사람들이 농담으로 그에게 ‘미지광이’라는 별명을 달아준 것을 보고도 한참 동안 웃었다. 그런 댓글들 밑에 영상의 주인공이 대댓글을 달아놨길래 대체 어떤 사람일까 하고 아이디를 타고 들어가 보았다. 단순히 흥이 많은 줄 알았던 ‘미지광이’씨는 알고 보니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었다. 아마추어가 아니고 프로 가수였던 것이다. 그의 노래와 그루브를 보고 나니 춤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영상들 중에서는 ‘1993년 지광이 춤’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있는데 노래를 부르는 그의 어머니 앞에서 춤을 추는 대략 초등학교 3-4학년 정도(나의 추정)의 지광씨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이클 부블레의 공연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지광씨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볼 수가 있다. 춤을 출 때 그의 환한 미소는 그 때부터 시작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때부터 가수가 되고자 하는 지광씨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던 걸까?
나는 운명이라는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다. 모든 게 다 정해져 있다면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하는 이유도 없어지고 그 동안 내 삶이 부정되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운명을 아예 안 믿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것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뿐이다.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운명을 ‘유전’과 ‘타고난 환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의학적으로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인간이 타고나는 기질(temperament)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누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여러가지 검사들도 개발이 되고 그에 따른 분류가 생겼으며 최근 들어서는 각 기질에 따른 신경생리학적인 이해들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위험회피’, ‘사회적 민감성’, ‘자극 추구’, ‘인내력’의 네가지 하위 분류로 나누어 각각이 어느 정도 되는지를 보는 관점도 있다. 예를 들어서 ‘위험 회피’ 기질이 높은 사람은 부끄러움을 많이 탈수가 있으며 이는 신경전달 물질 중 세로토닌이 많아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은 굉장히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의 기질이 이렇게 몇가지로만 절대로 정의될 수만 없다. 다만 그 사람을 이해하는 수많은 방법 중에 하나로 사용되고 참고될 뿐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정신의학적으로 한가지 대다수가 동의하는 부분은 이러한 기질은 유전적으로 타고난다는 것이다.
가끔 살다 보면 도저히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생긴다. 예를 들어서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해야한다던지 극도로 외향적인 사람이 몇 개월 동안 조용히 살아야한다던지 나와는 도저히 맞지 않아 어떤 보상이 주어져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많은 경우 나의 기질과 반대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타고난 기질을 거스를려고 하니까 마음이 답답하고 힘든 것이다.
누구나 다 자신의 기질을 찾고 그것에 맞춰 살 수만 있다면 행복에 빠르게 이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행운을 누리지는 않는다. 본인에 대한 탐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평생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찾더라도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인 관점에서 지나치게 튀는 것이라면 평생 억누르고 살아야할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예를 들어 지광씨가 많은 문화적 억압이 있는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평생 논밭이나 갈면서 조용히 살아가야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마 지광씨의 그 환한 미소를 절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동아시아권에서는 특히 그러한 기질에 대한 고려 없이 성격을 일방적으로 통일 시키려는 문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에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겪고 있다. 가끔은 사회적인 시선 속에 갇혀서 자신의 기질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다. 다행히 지광씨는 1993년 어머니 앞에서 신나게 춤추던 그의 기질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2015년에 그의 미소와 신명나는 춤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춤을 보고 알 수 없는 기분 좋은 감정을 느낀 것이 그런 기질을 순수하게 간직하고 있는 지광씨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도 사회적인 시선과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기질을 따라가는 지광씨를 응원하고 제2의 ‘미지광이’들이 우리나라에 넘쳐나는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