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인 게 어때서
거 봐, 넌 너무 착해빠져서 문제야.
그러니깐 밀당 같은 것도 좀 하고.
그렇게 산다고 알아줄 사람 하나도 없어.
결국 당연해진다니까? 사람 마음이 원래 그래.
늘 같은 레퍼토리다. 너 같이 착한 사람은 처음 봐, 그러게 내가 호구될 거라고 했잖아, 너는 그게 문제야 착한 거 좋지 근데 그게 사람 질리게 한다니까?, 남이 하는 충고에 일일이 귀담아들을 필요는 없다고 해도 결국 이 모든 게 너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말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말로 되받아치고 싶은 충동이 든다. 대체 그 '적당히'라는 게 뭐길래, 그러는 당신들은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나빠서 적잖이 행복하시냐고 말이다.
어릴 때부터 눈치가 빠른 나는 타인의 니즈를 파악하는 게 쉬웠다. A를 말하는 당신이 실은 B를 원한다는 것도, 아무렴 상관없다면서 보이는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은 것도 나는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내 친절과 호의는 간혹 오해를 사기도 했는데, 누군가는 내 행동을 단지 예쁨 받기 위해서라든지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서 하는 행동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는 말이 되려 상처인 줄도 모르고, 지나가듯 뱉는 상대의 말 한마디에 내 선의는 꼭 한 번씩 고꾸라졌다. 하지만 나에겐 그것이 기쁨이었다. 내 앞에 앉은 당신을 웃게 하는 일 말이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하는 행동이라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이 약간의 기대심리가 따를 때가 있다. 상대도 나를 똑같이 대해주거나 그 언저리의 호감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에게 한 톨의 마음이라도 보상받길 바라는 것이 내가 좋아서 하는 행동이라는 말에 모순을 일으킨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바라기'를 그만두었다. 상대의 마음을 캐치해 무언갈 해 줄 수 있는 나 자신이 만족스럽다면 그걸로 된 거다. 결국 네가 좋아서, 라기보단 그런 내가 좋아서, 가 더 큰 기제로 작용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러면 좀 어떤가. 너에게 잘해주는 내 모습이 좋아서, 그게 나의 기쁨이라서, 상대에게 잘해주면 좀 어떤가.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떠날 사람은 언제든 내 곁을 떠나게 되어있다. 그 사람이 내 곁을 떠나면 어쩌나, 내가 버려지면 어쩌나, 또다시 혼자가 되면 어쩌나, 그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느라 내 행동을 제어할 필요가 있을까. 고르고 고른 말이 매번 정답은 아니듯, 그저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가능한 마음이 이끄는 대로.
그러니까 우스갯소리로 현대판 마더테라사가 아니냐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 나는,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다. 내가 분리수거도 안 되는 쓰레기에게 목매다 호구가 될까 봐, 착해빠져 어디 사이비 종교에라도 끌려갈까 봐, 간이고 쓸개고 빼주다 못해 남의 빚이라도 떠안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나'에 대한 믿음이 크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니까. 이토록 사랑하는 나를 두고 감히, 나를 함부로 할 수는 없는 거니까.
물론 세상을 아름다운 시선으로만 바라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상대는 바란 적도 없는 호의를 베풀면서 자아도취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눈을 기르고, 인간관계에서 지켜야 할 선을 구분 짓고,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하는 욕심도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뉴스 기사는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진다. 그때마다 인류애가 짜게 식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을 움직이는 상대가 있거나 선의를 베풀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한번 마음 가는 대로 해보는 것이다. 누군가를 해치거나 사회의 악을 끼칠만한 범법행위가 아니라면, 나를 어림잡아 규정하는 타인의 말 한마디에 구태여 마음 쓸 필요가 있을까. 마치 나를 다 안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재단하는 너도 참 알만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그만이다. 그 눈빛을 들키든 말든 그건 자유다. 다만 모순적이거나 그릇된 나의 면모를 꼬집는 쌉싸름한 조언은 달게 받으면 된다. 알약으로 둔갑한 초콜릿이다, 생각하며 꿀꺽. 내가 나인 건 아무런 잘못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