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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도댕 Oct 14. 2023

약속한 밤은 어디로,

취침시간 지연행동

오늘은 다를 거라 했잖아, 언제까지 시간만 태울래.


새벽 3시가 다 된 지금도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나는 어제 나와 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또, 또,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부와 명예로부터 멀어지는 거려나. 언젠가부터 세상에는 시간을 나노 단위로 쪼개 사는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동기부여라도 하려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갓생러들의 삶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목격된다. 그럴 때면 나는 2호선 안에 갇힌 병아리가 되어 어미 닭만 쳐다볼 뿐이다. 살려 주세요, 저 배고파요, 엄마. 실제로 배가 고픈 것도 경제적으로 배가 고픈 것도 맞으니 어쩌면 정말로 병아리가 된 걸지도 모르겠다.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바삐 움직이는 당신들과 달리, 가계에 보탬이 되기엔 전 아직 멀었나 봐요.


갓생, 그래 그게 뭔지는 몰라도 어디 한 번 바삐 지내보자. 늘상 다짐하면서도 매번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불면증의 이유는 스트레스도 있고 지나친 스마트폰 사용도 있고 식습관의 문제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여기에 다 속하면 어쩌라는 거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시간을 태우고 싶을 때가 있다. 실제로 충전이 되기도 하지만, 쉬는 날 스무 걸음도 채 걷지 않는 날에는 그게 일종의 도피임을 깨닫는다. 고작 3평 남짓한 방에서 나가지 않는 게 최선이라니, 이러다 신문지 한 장에 쪼그려 앉는 날이 올 지도.


무력한 날들이 지속된다고 해서 사람을 만나기 싫은 건 아니다. 가끔은 약속이 두려울 때도 있으니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된 건가. '나'라는 인간을 주제로 논문을 써야 한다면 내가 간헐적 우울을 겪는 이유에 대해 술술 써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나를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건 벌거벗은 채 제 발로 도심 한복판에 서는 것과 같다. 내가 내 감정을 여실히 드러낸다는 것은,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감정의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가 찌질한 면모와 결핍의 응집체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가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일을 위해 마땅히 잠을 자야 할 시간임에도 멀뚱멀뚱 SNS나 유튜브를 보는 행위가 일종의 지연행동일 수 있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취침시간 지연행동'이라고 한다. 자기 전 침대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지친 하루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든지, 불안이나 스트레스 따위의 감정을 잊기 위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일상으로부터 도피할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렇게라도 잊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이고, 그렇게라도 나를 즐겁게 해 주고 싶다는 것이다. 적어도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밤 시간만큼은 말이다. 그러니까 밤의 시간이 자꾸만 길어지는 것은 마음의 공백을 메꿔줄 대체재를 찾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몇십 분이고 몇 시간이고 인스타 속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거나, 좀 전에 봤던 영상을 보고 또 보는 행동이 뇌를 지배할 때면 '나'를 둘러싼 문제가 한결 가벼워진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사람들이 콘텐츠의 늪에 빠지게 된 건 코로나 블루의 영향도 있겠지만, 좀 더 근본적인 원인은 함께(혼자)이고 싶으면서 혼자(함께)인 '실제적 나'와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스탠스를 바꿀 수 있는 '이상적 나'와의 충돌 때문은 아닐까.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버겁다. 그럴 때면 피치 못하게 나를 혼내야 하는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 타고난 기질 탓에 족히 인생의 3분의 2는 스스로를 탓하며 살아온 내게 자아성찰은 꽤나 가혹한 일이다. 그럼에도 어쩌겠는가. 산다는 건 죽을 때까지 '나'를 알아가는 일일 것이다. 내가 언제 어디서 가슴이 뛰고 또 무엇 때문에 가슴이 저리는 지,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하는지, 왜 지금 당신이 그립고 또 보고 싶은 지, 끊임없이 내게 묻는 것이다. 나조차도 나를 속이는 마당에 쉬운 여정은 아니겠지만, 운이 좋다면 그 끝에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겠지. 그러니 오늘 또다시 약속을 못 지킨다 한들 너무 채근하지는 말 것. 그리 대단하진 않아도 우리가 견뎌낸 하루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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