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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도댕 Oct 14. 2023

n번째 춘기

살가운 딸이 되는 일

나는 방 3칸짜리 아파트에 살아. 거실에서 내다보는 야경이 꽤 근사한 곳이지. 널찍한 침대를 둔 큰 방과 오로지 서재로만 쓰이는 작은 방이 달려 있어. 제일 큰 방은 드레스룸이고. 쉬는 날이면 소파에 드러누워 보고 싶었던 영화나 드라마를 봐. 가끔은 주방에서 요리도 하는데 꽤 먹을만해. 냉장고에는 쟁여놓은 맥주가 한가득이고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산책을 하러 나가. 외박도 내키는 대로 하고. 어차피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거든. 그러다 월요일이면 한껏 차려입고 출근을 하겠지. 퇴근 후에는 이런저런 약속들로 바쁠 테고. 아, 물론 지금 이야기는 아니고 먼 미래에 말야. 그렇게 살면 매일매일이 얼마나 즐거울까?


어른이 된 나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어릴 적 으레 하는 상상에 (아마도)라는 문장부사를 끼워 넣지 않은 것이 실수이려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내 나이쯤 되면 뭔가 대단한 걸 이룰 줄 알았다. 방 3칸짜리 아파트를 소유하겠단 배포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현재의 '나'는 그저 n번째 춘기를 겪고 있을 뿐이다.


가끔 보면 시간이 아주 비정상적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달력을 볼 때면 저만치 멀리 달려가는 시간이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지금의 내가 못마땅한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 막연히 꿈꿔 온 이상적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에 야속함은 더해진다. 아직도 부모님 집에 기생하는 나는 슈퍼싱글 짜리 침대와 책상이 간신히 들어간 제일 좁은 방을 차지하고 있다. 여전히 티비는 내 차지가 아니고, 정성껏 요리를 해 먹기보단 인스턴트식품을 데워 먹을 때가 더 많다. 다행히 월요일이면 출근을 하긴 한다만, 비교적 편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모양새다. 퇴근을 하면 입 밖으로 말을 뱉기도 지쳐 겨우 밥을 욱여넣고는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눕는다.


그래, 뭐 지금이 좋을 때도 있지. 하지만 매 순간 행복하지는 않다는 점은, 내가 세상에 이름을 날린 대단한 인간이 아니란 점은, 붕 뜨는 기분을 잡아다 나를 가라앉힌다. 이상하다, 나 분명 나를 사랑하는 데 말야. 가끔씩 드는 이 기분은 뭘까. 요즘의 나는 자꾸만 신경이 곤두 선 나를 발견한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가족들의 시선은 애지중지 키운 막내딸에게로 향하는데, 나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곧장 방으로 향한다. 그럴 때면 문 뒤에 선 나는 나의 지난 철없음을 꾸짖는다. 좀 더 살갑게 대꾸할 걸 그랬나, 거실에 좀 더 머무를 걸 그랬나, 별별 생각이 다 들다가도 다리의 힘이 풀려 금세 주저앉고 만다. 또 실패다. 살가운 딸이 되는 일 말이다.


우리 집이 화목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에는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하 호호 떠들기는커녕 다 같이 외식을 하러 나가거나 여행 가는 일 따위는 없으니까. 우리 집은 아마도 N극과 N극, S극과 S극인 모양인 지 좀처럼 한데 붙을 줄 모른다. 이는 내가 대부분의 친구 집을 부러워한 이유기도 하다. 그렇다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없다거나 서로 간의 애정이 없다는 추측에는 당연하듯 반기를 든다. 당신들이 내게 애정표현을 에둘러하는 것처럼 나도 에두른 애정표현이 당연한 사람일 뿐이라고. 그렇게 꼭 우리 집 네 사람은 퇴근길에 치킨 한 마리 사가는 옛날 아버지식 애정표현이 몸에 밴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게 사랑이었고, 그걸 사랑이라 부르며 받아먹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우리 가족이 사는 방식을, 그런 우리 가족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됐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제와 사춘기를, 아니 오춘기를 겪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사회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집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만큼이나 나를 좀 먹는 일도 없을 텐데, 나는 꼭 그렇게 먹구름을 떼어다 천장에 갖다 붙였다. 물에 젖은 솜뭉치마냥 움츠러드는 요즘의 내가 좀 더 살가운 딸이 되는 날이 올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표현에 당신들의 언 감정이 녹길 바라며, 여전히 비겁한 딸은 오늘도 치킨 한 마리를 사 간다. 여기 든 게 사랑이라고, 사랑이 맞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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