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도댕 Jan 18. 2023

약속 없는 저녁, 오히려 좋아

행복을 꺼내 먹어요

여전히 서툴지만 스스로를 가장 사랑하게 된 삼십 대의 나는 행복을 자주자주 꺼내 먹는다.


나를 웃음 짓게 하는 일을 꺼내다 그 이름을 행복이라고 지으면 나는 아주 쉽게 행복한 사람이 된다. 쳇바퀴 도는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로 매일 다른 크기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을 내가 행복이라고 믿어만 준다면.



춥건 덥건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인데 움츠려드는 날씨 탓인 지 요즘에는 퇴근하자마자 집 가는 걸 즐긴다. 집순이와 밖순이가 정확히 반쯤 섞인 나는 약속쯤은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다. 에너지 충전소가 안팎에 있다면 요즘에는 내 방에 조금 더 포진해 있을 뿐.


약속 없는 저녁, 오히려 좋아.


퇴근 후에도 투잡을 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 각종 모임에 참석하며 인간관계를 넓히는 사람들, 온갖 취미생활로 저녁을 가득 채우는 사람들, 나의 저녁은 생산성과는 거리가 멀다. 가끔은 나만 멈춰있는 게 아닌가 싶어 조급한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는 나랑 제일 잘 놀아야 한다고 믿는 나는 지금 단순하게 살고 싶은 나의 요구를 충분히 들어주고 있다.



일을 마치면 나는 곧바로 비활성화 모드를 켠다.


온몸에 투명 보호막을 두르고선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오늘은 어떤 콘텐츠를 볼까, 나를 웃음 짓게 하는 일들을 꺼내다 쓴다. 그러다 몸을 움직여 설거지를 하고 바닥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한다. 그러다 또 찌뿌둥하면 요가매트에 앉아 잔뜩 틀어진 골반을 풀면서 SNS를 슥- 둘러본다. 그러다 책을 읽고 책을 읽다 질리면 영어공부 어플을 켜 두어 개라도 본다. 전화로 수다를 떨거나 쇼핑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네다섯 시간쯤 되는 오늘의 저녁이 끝이 난다. 물론 이마저도 다 귀찮을 땐 얼마쯤 나를 내버려 둔다.



내 소소한 모든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시간. 내 기쁨은 이렇게 작고 소소한 데서 출발한다.


단순한 데서 느끼는 행복이, 나를 아주 쉽게 충만하게 만들어준다는 믿음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나의 이러한 믿음이 자기 객관화가 가장 잘 되어있는 시점의 나를, 가장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주었다. 단언컨대 자신의 행복을 스스로 결정짓는 태도는 행복의 순간들로 점철된 인간을 빚는다.



하루 24시간을 케이크라고 생각했을 때, 겨우 한 조각만으로도 행복해진다니.


운이 좋은 날에는 하루가 얼마나 더 달콤할까. 그러니 가끔은 토핑이 맛이 없어도 생크림이 상해버려도 실수로 바닥에 엎질러도 괜찮다. 케이크는 다음날에도 배달된다. 내일도 꺼내먹자, 맛있을 행복을.


이전 01화 사랑이 예쁘게 영글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