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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담 Dec 12. 2023

전체주의에 파멸되는 개인을 바라보며

조지 오웰 <1984>

 '디스토피아'라고 하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설은 조지 오웰의 1984였다. 1984가 어떤 소설인지 잘은 모르더라도 빅 브라더만큼은 익히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극단적 전체주의인 오세아니아에서 윈스턴이라는 한 개인이 독재에 저항하고 자유를 향한 의지를 가졌다가 결국 파멸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소설이 바로 1984다.


 책은 윈스턴의 아파트 입구에 당이 내세웠던 허구적 인물인 빅 브라더가 새겨진 거대한 포스터를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이 포스터는 빅 브라더의 눈동자가 자신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도록 고안되었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빅 브라더의 눈동자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동전, 우표, 책표지, 깃발, 포스터, 담뱃값 등 어디에나 있는 당신을 감시하는 눈을.


 심지어 그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당신이 자든 깨어있든, 일을 하든 쉬든 하물며 목욕을 할 때든 집 안까지도 당신은 감시하는 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곳곳마다 설치된 금속판의 텔레스크린은 당신의 소리와 동작까지 감지할 수 있으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소리를 끌 수 조차 없다. 집 밖에선 마이크로폰이 도청을 하고, 헬리콥터가 순찰하며, 사상경찰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검열한다.


 일기를 쓰는 것조차 범죄가 되는 세계, 아니 아무것도 쓰지 않은 노트만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상범으로 취급되는 사회에서 당신의 자유사고는 가장 문제시되는 것이다. 당의 미움을 산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개인의 욕구마저 불필요하다. 가장 기본적인 성욕마저 통제하는 사회에서 출산은 오로지 당에 봉사할 아이를 낳기 위함이다.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없다. 잔혹한 폭력으로 둘 더하기 둘이 다섯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지켜봐야 했다. 고문을 통해 둘 더하기 둘이 셋도 넷도 다섯도 될 수 있는 모습을 보면서 고통스러웠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무력하게 무너지는 존재가 되는 것을 바라보면서 섬뜩했다. 인간성은 말살되고 과거는 날조되며 자유는 사라져 버리는 암울한 사회란 디스토피아 그 자체였다. 정말이지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는 이미 1984년을 지나왔다. 전체주의를 비판하며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던 이 소설은 어디에나 감시카메라가 있고 언제나 도청당할 수 있는 기기에 노출된 우리에게 비단 멀어진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나는 소설 속에서 윈스턴이 했던 두 가지 말을 분명히 기억한다. 사람의 속마음까지는 지배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온전한 정신은 통계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


 완독 후에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는 소설이지만 일단 폈다면 몰입감에 정신없이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한다. (2부에 '그 책' 내용으로 진도가 더디게 나가는 고통이 숨어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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