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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제 Apr 20. 2024

끝 그리고 다시 시작

트루먼쇼

민영언니의 연락을 받고 고민도 없이 더 이상의 만남을 지속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건 믿을만한 정보통의 얘기였다. 모태신앙으로 성당에 계속 다니고 있는 사촌언니에게 이 일을 상담했었는데 언니는 내 얘기를 듣자마자 기겁을 하며


'그거 완전 100퍼센트, 아니 완전 200퍼센트 사이비야!'

'성경 공부는 목사님이랑만 할 수 있는 거고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신학대학을 가던지 해야 해. 성당 안에서도 신도들끼리 서로서로 성경공부를 한다? 그거 완전 안 되는 일이야!'


라며 신신당부를 했더랬다.




잠시나마 믿었었던 코칭선생님과, 꽤나 오랜 시간 알고 지냈던 민영언니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고, 약 4주간의 바보 같고도 멍청하고도 어이없었던 그 인연이 끝났다.


아니, 끝난 줄 알았다.


그렇게 민영언니를 조용히 차단하고, 코칭선생님에게는 연락 안 하셔도 된다고 못을 박고 일주일 후 주말.

그날도 루틴처럼 늘 가던 카페에 들렀다.


보통 점심 먹고 나와서 카페에 앉아 이것저것 공부도 하고 사부작대며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 먹기 전 즈음 카페를 나오는데 그날은 좀 이상한 날이었다.


카페에 루틴처럼 다닌 지 어언 8개월.

그 사이에 카페직원들과도 대충 안면을 트고, 자주 오는 손님들의 패턴도 좀 파악했는데, 그곳은 학교 앞에 위치해 있어서 주로 학생들이나, 간혹 영업을 위해 오는 영업사원 등이 자주 오는 곳이었다.


자주 앉는 소파구석자리 바로 맞은편에 한 젊은 남녀가 오더니, 10분 뒤에 한 명이 더 오고 5분 뒤에 두 명이 더 오고, 총 일곱 명이 모이더니 느닷없이 본인들끼리 성경공부를 하는 것이 아닌가


8개월 동안, 아니지

인생 전체를 돌아봐도 카페에서 자기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는 광경을 보지 못했었는데, 갑자기 지금 이 시점에?


마치,

'성경공부 하는 거 생각보다 흔해!'라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는 듯이 너무나도 열심히 공부를 시작하는 그 무리들을 보며 나는 문득 내 입방정을 떠올렸다.




처음 만나면 응당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하기 마련인데 민영언니와 코칭선생님에게 미주알고주알 내가 일하는 곳, 집이 어느 쪽인지, 쉬는 날은 뭐 하고 주로 어딜 가는지 등등에 대해 실컷 떠들어댔던 게 기억이 났다.


그에 반해 난?


사실 어느 정도 질문을 서로 주고받긴 했지만, 정보가 탈탈 털린 건 누가 봐도 내쪽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 일하는 곳, 자주 가는 곳에 대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난 조금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페일을 시작으로 마치 날 다시 데려오겠다고 작정을 했는지 이상한 일은 계속되었다.


예를 들면, 버스정류장에 버스를 기다리려고 서있는데 내 옆에 서있던 남자 두 명이 서로서로 성경 얘기를 한다거나.

퇴근길 버스 안에서 내 앞에 남녀가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다.


코칭선생님과 민영언니와의 만남이 설계였던 것부터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한 일들까지.

한동안 난 원래 가던 길과 다른 곳으로 돌아서 출퇴근을 했고, 뒤에서 누군가 날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버스를 타면 늘 맨 뒷자리에 앉고 다니곤 했다.


마치, 트루먼쇼의 주인공이 된듯했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주인공이 자신의 삶이 방송이고 거짓된 세계였다는 걸 깨닫고 굉장히 공포스러워했는데, 당시의 나는 어려서 그랬는지 그 기분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상하긴 하겠지만 저렇게까지 무서워할 일인가? 싶었는데, 웬걸? 내가 그런 입장이 되니까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그렇게 돌아다닌 지 한 달이 조금 넘고 나서야 그들은 잠잠해졌고 난 다시 평소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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